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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 5주일 다해 전례 말씀 묵상
사순 제 5주일 다해
제 1독서 이사야 43,16-21
제 2독서 필리피 3,8-14
복음 요한 8,1-11
주교회의의 판단에 따라, 이 주일부터 성당에 있는 십자가와 성화상들을 가리는 관습을 보존할 수 있다.(한국 교구들에서는 이 관습을 보존한다) 십자가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거행을 마칠 때까지 가려 둔다. 성화상들은 파스카 성야 예식을 시작할 때까지 가려 둔다.
파스카 성야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세례 준비로 셋째 수련식을 이 주일에 거행한다. 이 수련식에서는 고유 기도문과 고유 전구를 사용한다.
오늘은 사순 제 5주일이다. 지난 사순 제1-4 주일까지는 루카 복음을 읽었다. 그런데 사순 5번째 주일인 오늘은 요한 복음을 읽는다. 왜일까?
요한 복음은 하느님으로서 주님을 기술했기 때문에 공간 복음에 나오는 족보가 생략되어 있다. 예수님 탄생 기록도 없다. 주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시다. 주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기록이 없다. 하느님은 시험 받을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의 기록이 없다. 어느 때에라도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1요한 4,12).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하느님이신 주님,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 “나는 ~ 이다”라는 7가지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있다.
- 생명의 빵(6,35
- 세상의 빛이요 8,12 ;9,5
- 양의 문이다 10,7.9
- 나는 선한 목자이다 10,11. 14-15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25-26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15,15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요한 복음의 앞 부분을 보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바로 갈릴래아에 가신다. 카나에서 첫 기적을 하신 후에 나오는 장면이 파스카 축제에 예루살렘 성전를 정화하신 모습이다. 이 때부터 “많은 사람이 그분(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요한 2,23-24)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신분’은 죽으시고 부활 하시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는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를 쓴 목적도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20,31)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중간 부분(10장) 가까이에 위치한다. 8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고 나온다.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 성전 건너편에 있다. 키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끼고 예루살렘 성전과 올리브 산이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다. 예수님이 예수살렘에 계실 때는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올리브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나가 묵곤 하셨다.” (루카 21,37)
예루살렘 성전과 올리브산을 연결하는 예루살렘 구 도시 성문들은 ‘동문, 황금문, 사자문’이다. 이중에서 올리브산과 제일 가까운 문은 황금문이다. 황금문을 통해 성전에서 나오면 바로 키드론 골짜기와 연결되고 이어서 올리브 산이 된다. 올리브 산 근처에는 베파게와 베타니아 마을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마을 중에 예수님은 주로 “베타니아로 가시고”(마태 26,6 ; 마르 11,11 ; 14,3 ; 요한 11,1) “그 곳에서 밤을 지내곤 하셨다”(마태 21,17)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 다섯 스타디움(1 스타디움 185미터)쯤 되는 가까운 곳이며”(요한 11,18) 그 곳에는 친구 라자로(요한 11,11)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베타니아로 내려가는 길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를 구분하는 담벽을 쳐 놓았다. 베타니아가 팔레스티나 자치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전을 나와 베타니아로 가려면 사해로 내려가는 길을 통해서 돌아가야만 한다. 성경에서처럼 더 이상 “가까운 곳”(요한 11,18)이 아니다.
2절부터는 오늘 복음의 핵심 배경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셨다.
유대인들은 과월절(무교절, 파스카), 초막절, 오순절(보릿단을 바치고 50일 째 되는 날)을 3대 절기로 지켰다.(출애 23,14-17) 유대인은 모두 율법에 규정된 절기에 참여하여야 했다. 남자는 12세가 되면 성인식을 통해 율법에서 말하는 유대인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이 여러 번 나타나고 있다. ①파스카 (2,23) ② 무명의 축제 (5,1) ③ 파스카 (6,4) ④ 초막절 (7,2) ⑤ 성전 봉헌 축제(10,22) ⑥ 파스카 (13,1) 이다.
예수님께서 파스카를 한 번만 지킨 것으로 기록된 공관복음을 보면 주님의 공생애 기간이 마치 1년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파스카를 지킨 일이 최소한 3번이 나타난다. 성경 학자들은 이러한 요한복음의 기록에 근거해서 주님의 공생애가 3년이상 지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파스카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간 기록에 대해서는 요한 복음의 기록이 보다 더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마태13,54), 호숫가에서(마르2,13),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며(마르 6,6),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마르10,1)에서 가르치셨다. 이제는 성전에서(루카 17,47 ; 요한 7,14) 가르치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 오시기 전에는 일반적으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가르쳤다. 성전에서 ‘모세의 자리’에 앉는 이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마태 23,2) 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마태오 복음에서 상세한 내용을 알 수가 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2-12) 즉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율법을 연구하여 일반 사람들에게 가리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섰다. “온 벡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통적인 학습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교사나 랍비가 아니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지식인이었고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율법의 형식만을 고집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기 보다는 구속을 당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라고 한다.(마태 23,2-3 참조)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한다(6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질문한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다.(레위 20,10; 신명 22,22 참조)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했더라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린 자라는 죄인 취급을 받으실 것이 뻔하였다.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을 것이면, 로마의 정권을 거스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에는 로마의 정권이 유대 민간에게 사형 집행권을 허락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급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상대자가 바뀌었다. 더 이상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 상대하지 않으신다. 마치 그들의 질문을 못 들은 사람처럼 행동하신다. 이러한 예수님께 그들이 줄곧 질문한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이 말을 듣고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그 자리를 떠나가기 시작했다. 모두 떠났다. 예수님만 남았다.
예수님 앞에 혼자 남게 된 여인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을 것이다. 어쩜 다른 사람들처럼 그 자리를 도망쳐 달아나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지려 한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원해 준 예수님께 자신을 맡긴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든 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마라”.
주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 죄를 인정하고 회개함으로써 용서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하느님은 “잘못을 따지지 않으신다”(로마 4,8 ; 시편 32,1-2). 하느님은 죄를 덮어주신다(로마 4,7).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지워 없애신다.(사도 43,25)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신다.(사도 44,22)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사도 43,25 ; 히브 8,12 ; 히브 10,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