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제자수녀의 창작 콘텐츠로 도와드립니다!
전례자료실
사순 제 4주일 다해 전례 말씀 묵상
사순 제 4주일 다해
제 1독서 여호수아 5,9ㄱㄴ10-12
제 2독서 2 코린토 5,17-21
복음 루카 15,1-3.11ㄴ-32
오늘 미사에서는 보라색 또는 분홍색 제의를 입을 수 있다. 악기를 사용할 수 있고, 제대에 꽃 장식을 할 수 있다.
<파스카 성야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세례 준비로 둘째 수련식을 이 주일에 거행한다. 이 수련식에서는 고유 기도문과 고유 전구를 사용한다.>
사순 제 4주일이다. 오늘 복음은 사순 시기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죄인, 회개에 대해 또 다시 언급한다. 사순 제3주일 주제인 자비와 회개 그리고 죄인들에 대한 이야기의 연속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세상 안에서 죄, 죄인이라는 개념을 밝히려고 한다. 알려주려고 한다. 누가 죄인인가? 누가 회개해야 하는가? 왜 회개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죄인의 의미를 모를 때 회개는 동반되지 않는다. 즉 예수님이 우리 인간 세상에 오신 의미를 모르는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처럼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이 되는 것이다.
복음 안으로 들어가 보자.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님 곁에 누가 있는가? 누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이들이다. 예수님께 다가가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관심이 있다. 알아들으려고 한다. 배우려고 한다. 이들의 이름은 세리들과 죄인들이다. 예수님 곁에는 또 다른 이들도 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다. 이들은 성전에서 가르치는 이들이다. 학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쪽 부류의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하면서 투덜거린다. 여기에는 물론 군중과 제자들도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님이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어떤 대답을 해 줄까 생각하며 지켜보고 있다. 나도 그 속에 있다. 예수님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세리는 세금을 징수하던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마태오와 세관장 자캐오이다.(루카 19,1-7) 이들은 부유하게 살았다. 그들이 부유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는 가장 큰 근거는 로마의 세금제도이다. 로마는 팔레스티나에 필요한 세금 총액만을 규정했고, 세리들은 그것에 맞춰 세금을 걷는다. 세금의 양을 정하는 것은 세리의 몫이었고 세금이 총액에 미치지 못할 경우 그 부담 역시 세리가 져야 했다. 반대의 경우, 남는 세금은 세리의 몫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유다인들은 세리를 민족의 반역자로 생각했고 이방인들과 접촉이 많은 이들을 죄인으로 여겨 어울리지 않았다. 오늘 예수님은 이런 세리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투덜거림을 당한다. 유다인들에게 질책을 받는다.
바리사이는 율법 해석상의 철저한 정확성과 율법의 세부적인 고수로 유명했다. '조상으로부터' 구두로 전승해오는 율법의 전통이, 정교한 체계로 발전하게 된 것은 율법 해석상에서 보여준 그들의 '정확성'에 기인한다. 그들은 '율법 주위에 울타리'를 두른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고, 때문에 '벽을 두르는 자'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즉 이들은 모세 오경에 바리사이의 전통이라는 '벽'을 둘러서 모세 오경을 가두어두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며, 동시에 비(非) 바리사이들을 자신들이 독점한 모세 오경의 은혜에서 배제하는 자들이라는 비난의 의미가 담겨있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유대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파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율법 해석상의 정확성뿐 아니라, 그들이 전통을 실제로 준수하는데 있어서 유대교 종파 중에서 가장 엄격했기 때문이다.
율법학자의 대표는 에즈라이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후 모세의 율법에 통달한 선비였기 때문에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에즈 7,6) 그 후부터 율법학자들은 최고 지성인으로 율법의 수호자로서 민중 앞에 나타났다. (집회 38,24 이하 : 39, 6-11). 그 후 이들의 설교는 「옛 사람들의 전통」이란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예수님 시대에 그들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 되다시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된 종교생활을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꾸짖으셨다.
복음의 전반부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듯이 비유에도 두 아들이 있다. 두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몫의 재산을 달라고 요구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청대로 두 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아버지 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 곁을 왜 떠나갔는지 복음에는 나와있지 않다.
아버지를 떠난 작은 아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방종한 생활을 했다.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다. 이렇게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때 작은 아들이 있는 고장에 심한 기근까지 들었다. 그는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작은 아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 고장 주민들을 찾아가 매달렸다. 주민들을 그를 자신들의 소유인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먹을 것이 부족했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굶어 죽을 것만 같았다. 그제서야 그는 정신이 든다. 아버지의 집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의 집은 어떠했는가? 아버지의 집에는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돌았다. 아들은 고백한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작은 아들은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한 삶을 통해 어려움을 겪었다. 마지막에는 생명을 이어주는 먹거리마저도 부족해 죽음을 예감한다. 그 죽음 앞에서 작은 아들은 ‘아들’이라는 자신의 신분까지도 포기한다. 자신의 신분과는 관계없이 아버지 곁에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버지 곁으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께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창녀와 함께 탕진해버린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달려가 맞이하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 탕자가 아버지를 배반하는 큰 죄를 지었지만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아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시며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시면서 잔치를 열었다. 아들은 품꾼의 한 사람으로 고용해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조건 없이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주었다. 한 때 과오로 집을 나갔지만 뉘우치고 돌아온 자식이 아버지를 더 기쁘시게 한 자식으로 평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큰 아들의 모습을 보자.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이 집을 떠난 그 기간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아들과는 달리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충실했다. 이렇게 충실했던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염소 한 마리 주신적이 없다. 아무것도 베풀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다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송아지를 잡았다. 손에 반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겨 주었다. 큰 아들이 바라본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그는 말한다. “저 아들이 오니까…” 하지만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었다.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종의 자리에 있었다. 큰 아들은 “종처럼 아버지”를 섬겼다고 스스로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큰 아들과 달랐다. 아버지의 생각에 큰 아들은 늘 당신과 함께 있었다. 아버지 자신의 모든 것이 아들의 몫이었다. 이와 반대로 아버지 생각에 자기를 떠난 작은 아들은 죽은 것이었다.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다시 복음의 처음으로 돌아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를 보자.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하는 제도권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말로만 가르치고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닌다.(신명 6, 8) 옷단 네 귀퉁이에 술을 달고 다닌다.(민수 15, 37∼40 : 신명 22, 12) 랍비 소리를 들으려 하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란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삶을 산 것이다. 위선적이었다. 이중적이었다. 이러한 그들이 세리들을 보고 죄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고 그런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투덜거린다.
이제 복음 묵상을 마치며 자문해보자. 나는 복음의 누구와 같은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투덜대지는 않았는가? 그들처럼 이웃과 타인을 판단하지는 않았는가? 큰 아들처럼 내 삶에 만족하지 않고 ‘종’ 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작은 아들처럼 내 몫을 챙긴 적은 없는가? 작은 아들처럼 내 신분과 관계 없이 신앙인의 자세로 살려고 노력하고 회심하였는가?
이 질문들의 대답이 어떠하든 예수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곁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회개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