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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사순 제3주일 다해 전례 말씀 묵상
사순 제 3주일 다해
제1독서 탈출기 3,1-8ㄱㄷ.13-15
제2독서 코린토 10,1-6.10-12
복음 루카 13,1-9
사순 제 3주일에는 파스카 성야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세례 준비로 첫째 수련식을 거행한다. 이 수련식에서는 고유 기도문과 고유 전구를 사용한다.
우리는 사순 제1 주일에 예수님 광야에서의 유혹을 보았다. 성령의 인도로 간 바로 그 곳에서 받은 유혹이었다. 이 유혹은 아버지와의 관계인 ‘하느님의 아들’로써의 존재를 재 확인시켜 준다.
사순 제2주일에는 예수님이 거룩하신 모습으로 변모된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 그리스도님이 받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었다.
사순 제3주일인 오늘 복음의 주제는 자비와 회개이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유혹의 손길을 이기고, 주님을 따르는 길, 그리스도인의 길, 변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회개가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신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한 일을 알린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 상황을 알린 것일까? 예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예수님은 떠오르는 해였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는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상황을 알리던 때만 해도, 먼 훗날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죽음을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누구인가?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라고 기도한다.
빌라도(라틴어 Pontius Pilatus, 재임 26년 ~ 36년)는 로마제국 유다 속주의 다섯 번째 총독이다. 유대인에 의해 고소된 나자렛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 여러 곳에서는 본시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루카 23,20~23; 요한 18,38, 19,4)며 손을 씻고(마태 27,24~25), 예수님을 놓아주려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요한 19,12) 하지만 그는 유다인들이 무서워 끝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요한 19,16)
유대인들은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빌라도가 사람을 죽여, 그 피가 제물에 묻어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바치던 제물에 피가 묻었어도 거기와는 상관하지 않고, 죽은 이들에 대해 더 관심이 많다. 그들에 대해 예수님의 생각을 묻는다. 본인들은 무죄이며, 죽은 이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당하는 불행을 범한 죄의 결과라고 보았던 것이다(욥기 4,7; 8,20; 22,4-5; 요한 9,1-2).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궁금해하는 죄인을 설명하기 위해 빌라도와 연관 된 사건을 말씀하신다. 갈릴래아 사람들의 죽음과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죽은 열여덟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빌라도는 예루살렘 있던 실로암이라는 연못을 재정비해서 더 깊이 파고, 또 망대를 쌓아 그곳으로 물을 끌어들이려는 사업을 추진했다. 예루살렘에는 물이 부족하고 물을 찾는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마어마한 공사에 필요한 예산이었다. 빌라도는 이 대공사의 재원을 성전의 돈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 빌라도가 보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돈을 긁어 모아 쌓아놓기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유대인들과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빌라도가 성전의 돈을 건드리면서, 유대인들은 실로암을 확장하는 일이 자기들에게 꼭 필요한 공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빌라도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된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실로암 공사 도중 쌓았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처럼 큰 사고가 터지자 화가 난 유대인들은 성전의 돈을 강제로 가져다 그 돈으로 벌이는 이 공사는 분명히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심지어 유대인들 중 비교적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북쪽의 갈릴래아 사람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빌라도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비밀리에 계획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정보가 빌라도에게 들어갔다. 정보를 입수한 빌라도는 시위를 막기 위해 군인들을 변장시켜서 성전으로 들여보냈고, 결국 그들은 시위의 주동자인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주동자들의 피를 성전의 희생 제물로 쓰는 동물들의 피와 섞는 잔인하고도 끔찍한 일을 벌였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固定觀念) 즉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이 죄의 결과라는 종교적 편견을 부정한다. 그리고 본문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그 죽음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죄 없음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죄인 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불의의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으며 동일한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하여 '재난과 죄'의 관계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실로암 '(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고 기혼샘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 사건으로 열 여덟 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빌라도가 물의 공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시한 수로 공사와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방식에 따라 죄의 대가로 해석하였을 것이나 예수님은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또 다른 예화인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포도나무(시편 80,8-11; 이사 5,2) 무화과 나무(예레 24,3; 호세 9,10)로 비유되는 경우가 있었다. 무화과나무를 심은 사람은 하느님을 비유하며, 열매는 이스라엘 백성의 참된 회개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 포도원에는 여러 가지 과실수들이 함께 심어졌다(2열왕 18,31; 미카 4,4).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주인의 기대에 어긋나게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재배인은 예수님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 재배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화과 나무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주인은 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한다. 무화과 나무는 산 비탈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이다. 포도 나무처럼 가지치기를 안 해 주어도 된다. 재배인의 손이 많이 가지 않는 나무이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면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과실수(果實樹)가 과실을 맺지 못하므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땅만 버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잘라버림'은 그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의 징벌의 수준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을 뜻한다고 보아야 하며, 하느님의 인내가 끝날 때 가해지는 심판의 최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마태 3,10; 7,19; 21,18-20).
이것은 마치 멸망 받아야 할 소돔성을 위해 중재의 기도를 올렸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창세 18,22-32) 예수님이 지니고 있는 신적인 인내와 자기백성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다. 둘레를 파서 거름을 줌으로서 예수님께서는 형편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정성을 쏟음으로써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궁극적 관심은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보여준다.
재배인은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상태에 달린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해 주시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줌으로써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회개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결정은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걸어간다. 이 미래에 죽음의 문도 지나간다. 아무도 이 죽음이 언제 닦아올 지 모른다. 하지만 3년 간의 기간을 주었듯이 주님은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신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이다. 하느님께서 회개할 수 있도록 유보(留保)해둔 기한이다. 이 기한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순 시기 동안 주님을 더 가까이 닦아가도록 하자. 주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바라보고 배우자.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영광’을 위해 마련된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