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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3주일(요한 4,5-42)
사순 제3주일(2020년 3월 15일)
요한 4,5-42
말씀 묵상 요점
1. 우물의 상징
2. 신랑인 예수님과 신부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 대화의 주제: 생명의 물, 남편
3. 하느님께 드리는 참예배
1. 장소: 사마리아의 시카르의 우물
“시카르”, “시켐”, “스켐”(수콧) 같은 장소다. 사마리아에 있는 시카르는 구약의 성조들과 관련하여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이며(창 48,21-22), 조상 야곱의 무덤이 있는 성지(여호 24,32)이다. 주전 926년경에 이스라엘 왕국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된다. 남유다의 수도는 예루살렘이고 북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였다. 유배시기 이 후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의 피가 섞인 민족이라 하여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 시대에는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마찰이나 불화가 잦았고, 혈투까지 벌어지곤 했다.
1) 우물
구약 성경에서 우물은 갈등과 화해의 장소이자 신랑이 신부가 될 여인을 만난 장소를 상징한다. 모세는 미디안 땅 우물가에서 아내가 될 치포라를 만났고(탈출 2,16-22), 아브라함이 보낸 종은 이사악의 아내가 될 레베카를 우물가에서 만났다(창 24,13-23). 또한 야곱이 아내가 될 라헬을 처음 만난 곳도 우물가였다(창 29, 1-30).
2. 신랑인 예수님과 신부의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
- 요한 1장: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내 뒤에 오시는 분’(요한 1,15)으로 소개한다. 요한 2장 카나의 혼인잔치
- 요한 3장: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신랑의 친구’(요한 3, 29)라고 소개한다. 바로 이어지는 4장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이야기가 나온다.
- 호세아 예언서 1-3장 :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호세아 3,21).
신랑과 신부의 비유는 호세아 예언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구약의 호세아 예언자는 자기의 슬픈 결혼생활 체험을 통하여 신랑이신 주님과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호세아서의 관점에서 본다는 예수님은 신랑이고, 사마리아 여인은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찾아간 것은 바로 신랑이 신부를 찾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2코린 11,2 :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이 없다. 이는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이 여인의 자리가 열려 있다는 의미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다.
4절 “그때에 사마리아를 가로 질러 가셔야 했다.”
그리스 성경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때에 예수님은 반드시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만 했다.” 먼 길이어도 사마리아를 거쳐 가신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다.
하느님의 뜻:
- 오랫동안 차별을 받고 소외당하며 살아온 사마리아인들에게 생명을 복음을 전하는 것.
- 예수님이 아니면 결코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의 여인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
6절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 지치신 예수:
아침 태양이 뜨기 전부터 걷기 시작하여 6-7시간을 걸으셨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신부를 찾아 오전 내내 걸으시고 점심 식사 때가 되어,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우물가에서 신부인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고 계신다.
- 그분은 지친 이들을 쉬게 하시려고 먼 길에 지치셨고,
-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시려고 목말라 하셨으며,
-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려고 배고파하셨다. 이것이 바로 육화의 신비다. (암브로시우스)
- 때: 정오 무렵
정오는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는 빛이 충만한 시간이다. 이 시간에 신랑은 신부를 기다리고 있다.
*일반적 의미의 낮 12시:
최고의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는 시간, 물을 마시고, 쉬고 싶은 시간,
*예수님의 정오: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시간에 세상 안으로 사람이 되어 오심. 그리스도가 세상 안으로 오셨기 때문에 빛이 충만한 시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높이 달린 시간, 세상을 위해 최고의 사랑이 드러난 시간이기도 하다. 신랑이 신부를 기다리는 시간.
*사마리아 여인의 정오:
사람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거나, 아니면 삶의 방향을 잃고 무기력하고, 만사가 귀찮아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일어난 시간.
묵상: 우리는 피곤할 때, 목마를 때, 허기졌을 때, 고통스러울 때, 어디에서 쉼을 찾고 있는가? 묵상해 보자.
-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단 둘만의 시간
예수님과 영혼의 관계는 누구도 깨어들 수 없는 문제다. 예수님의 사랑이 온전히 그 여인에게만 향해 있다. 당신의 사랑을 넘치도록 쏟아 부어 사마리아 여인을 일으켜 주고 싶어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단둘이 만나고 싶어 하신다. 우리 편에서 예수님과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질 때 우리의 신앙은 성장한다.
3.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주제: 생명의 물
7절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 예수님의 목마름
예수님의 목마름의 두 가지 의미:
첫째: 물리적 차원에서 예수님과 여인의 육체적인 목마름
둘째: 영적 차원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목말라 하는 영혼의 사랑, 서로를 향한 믿음의 목마름이 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목마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목마르다”(요한 19,28)하셨다. 무엇에 대한 목마름인가? 이는 사마리아 여인과 모든 영혼들을 향한 예수님의 목마름이다.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목마름: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 63).
-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청하시는 의미
- ‘하느님께서 너를 필요로 하신다. 하느님께서 너의 사랑에 목이 마르시고, 너를 찾느라 지치셨다’는 표현이다.
- 사람의 존재를 직관하시는 예수님의 시선: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몸에서 성령의 샘물이 솟아나올 수 있다는 실재를 알아보시고 물을 달라고 청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여인이 주님께 물(사랑)을 드리면, 주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사랑)을 여인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 그러나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맑은 샘물을 보지 못하고 자꾸 밖에서 길어다 마음에 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적 차원이 장님이 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 사마리아 여인의 상태
9절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인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 다섯 차례 결혼했다가 이혼당했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는 여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겨준 남자들 때문에 경계심만 있을 뿐이다.
- 유다 남자가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의 물을 마시면 정결법과 사회규범을 어기는 것이라는 전통과 관습에만 익숙해져 있는 사마리아 여인은 영혼의 눈이 멀어 있고, 마음이 닫혀 있어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 여인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
10절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인이 모르는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구원에 대한 진리와 관련이 된다.
첫째: 여인이 받게 될 하느님의 선물
둘째: 예수님의 신원이다.
하느님의 선물과 마실 것을 청하는 이는 동일 인물이다.
♠ 하느님의 선물인 생수는 진리, 영, 말씀이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달리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혜가 누구의 선물인지 아는 것부터가 예지의 덕분이다”(지혜8,21).
- 유다인 전통에서는 토라(율법)를 ‘살아 있는 물’이라 부르는데, 살아
있는 물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말씀이고, 진리이며, 영이다.
인간의 목마름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선물뿐이다. 하느님의 선물은 인간이 노력을 해서 취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주셔야만 받을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하루 평균 43명이 자살을 한다고 한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생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이 주는 재물의 샘, 명성의 샘, 미색의 샘에서 오염된 물, 탁한 물을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영생이 이토록 절대적인 것이라면 예수님은 왜 거저 주지 않으시는가?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선물이기 때문에 강제로 줄 수 없다. 선물은 받아들일 때 선물이 된다. 전화 벨이 울리지 않는데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개별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선물을 받고도 갈증을 느끼는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지 않기 때문이다.
5) 사마리아 여인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점:
11-12절 “우물은 깊고,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에서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선생님은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여인은 스승을 존경하고 신뢰하며 가르침을 열심히 들었지만, 여전히 일반적인 사고 틀과 조상의 전통에 갇혀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을 이해하지 못했다. ‘물’과 ‘생명’간의 연관성도 이해하지 못했다. 물과 생명과의 결합을 열망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4. 대화의 두 번째 주제: 남편
16절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예수님께서는 대화의 주제를 개인적인 영역으로 돌리신 이유:
- 여인이 생수의 의미를 알아 듣지 못하는 여인을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신적 정체성(초월적 능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 여인의 믿음을 돕는다.
- 남편들에게 받은 가장 아픈 내면의 상처가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세 가지 명령을 내리신다. “가서”, “불러”, “오너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는 여인의 솔직한 고백에 예수님은 만족하신다. 여자의 생활은 불안정하고 무질서하다. 하지만 여인은 자신의 실제 모습을 빛 안으로 가져와 바로 깨달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실재가 그녀의 존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다섯 남편
학자들은 이 다섯 남편에 대해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 다섯 남편은 사마리아인들의 우상 숭배를 지적한 것이다. 야훼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방인들의 신전을 다섯 개나 짓고, 우상을 섬기는 사마리아인들의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2열왕 17,29-31).
- 여인의 내적 상처를 의미할 수도 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는 여자는 두 차례 결혼할 수 있었고, 최대 세 차례까지 가능했다. 이혼하는 것은 ‘남자 마음’이었다. 음식을 태워도, 아기를 낳지 못해도, 남편이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본 부인이 싫으면 이혼이 가능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다섯 번이나 남편들에게 버림 받았다. 당대에는 남편은 여자의 보호자였고, 이혼을 하게 되면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 힘들었다. 이 여인은 남편들에게 버림을 받으면서 점점 황폐해졌고, 자신도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 숫자적인 의미로는 이미 다섯 남편이 있었고, 현재 살고 있는 남편
도 진짜 남편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만남으로 완전한 숫자 ‘7’이 되었다.
그럼 왜 남편이 필요할까? 진리는 쌍방이 나누는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 때에만 그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사랑을 나눌 남편이 필요하다. 서로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고 나누고 살아 움직이게 할 남편 예수님이 필요하다.
- 이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다.
수많은 내적 상처를 안고, 바라지 않는 비참한 상황에서 숨 쉬기도 힘들 만큼 내면에 타오르는 목마름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이다. 물 긷는 것도 귀찮고 벅차고 힘들다.
- 육신의 목마름: 건강했으면, 잠을 잘 잤으면,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다면 온갖 질병 때문에 이렇게 날마다 가슴 조이며, 살아간다.
- 정서적 목마름: 조각난 인간관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는, 위로와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 영적 목마름: 욕구불만, 정서적 불안에 시달리며, 자기를 부정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해 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현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병은 우울증이라고 한다. 제일 잘 팔리는 약도 우울증 약이라고 한다.
5. 대화의 세 번째 주제: 예배
21절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이 구절은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여라.’ ‘신랑인 나를 믿고, 나에게 맡기라’는 신랑이신 예수님의 호소이다.
- 참된 예배란: 하느님과 참된 자녀의 관계를 맺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부모와 자식간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기를 원하신다.
- 참된 예배의 요소: 영과 진리이다. 영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는 성령이 이끄시는 예배다. 성령의 활동 없이 진정한 예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위해 나와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 진실한 예배자들: 영으로부터 태어난 이들(요한 3,3-8), 진리를 통하여 거룩하게 된 이들,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된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이들을 말한다(요한 17, 17-19).
23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찾으신다: 두리번거리면서 열심히 찾고 계신다는 뜻이다.
‘예배하다’는 그리어 동사 프로스퀴네오이다.
프로서(전치사): 누구에게, 퀴네오(동사): ‘입맞추다’라는 동사와 합성어이다. 예배하다는 종교적인 용어이지만 애정적이고 세속적인 용어와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입맞춤은 의무가 아니라 자발적 애정과 기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으로 이해한 것에 대한 의지적인 노력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의지적으로 행할 때 믿음이 성장된다. 사실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감정과 상상력이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육의 인간에서 영과 진리의 인간으로 변화되어 당신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곧 진정한 예배가 된다. 이 모든 일은 그분의 선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을 찾고자 하는 데에는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찾고 계신다는 깊은 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4절 “하느님은 영이시다”
“하느님은 빛이시다”(1요한 1,5).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본질을 밝히고, 하느님의 전능, 초월성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성령과 진리 안에서 경배하라는 것은 자신의 온 존재로 하느님을 향하라는 초대이다. 그렇게 할 때 진리의 성령은 우리를 새로운 형상으로 만들어 가시고, 우리는 성령께 순응하게 된다. 이런 변화의 삶이 바로 아버지를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분을 안다는 고백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