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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부활 제6주일(요한 14,15-21)
부활 제6주일(2020년 5월 17일)
요한 14,15-21
도입
지난 주에 이어지는 말씀이다. 힘이 없고, 연약하고, 상처받기 시작한 제자 공동체도 스승의 마지막 말씀에 힘입어, 주님의 사명을 이어갔다. 또한 복음의 저자 요한은 환난을 겪고 있는 자기 공동체 신자들에게(요한 묵시록 1,9참조)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해 스승 예수님이 남긴 유언의 말씀을 기록했다.
시대마다 겪어야 했던 어려운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었던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발사모 향유처럼 우리 마음 안으로 젖어 들도록 해야 한다.
말씀묵상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스어 Agape 사랑의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다.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행복만을 바라면서 자기 생명까지 내어 주는 무상의 사랑, 원수까지 사랑하고, 자신을 포기하는 그런 사랑을 뜻한다. 이 사랑의 특징이 예수님 제자들의 삶이 되어야 한다. 만약 사람이 이렇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단지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가슴에 새겨주고 싶은 메시지는 오직 사랑이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예수님 자신을 위해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고,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과 계획에 완전히 빠져들어가 는 것이다. 마치 신랑과 신부가 하나가 되어 모든 삶의 계획을 함께 하고, 사랑하는 사람 외에 그 누구도, 무엇도 마음의 중심 자리에 두지 않는 사랑이다.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은 계명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계명에 복종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적은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명령한 대상은 악령과 자연(풍랑, 바다)이다. 자연의 힘과 악한 힘은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가 않다. ‘Obbedienza’ 순종은 복음에서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에게 순종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닮도록 부르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삶과 조화를 이루도록 사람을 부르셨다. 아버지 하느님의 삶이 바로 ‘agapan아가판(agape의 동사형)사랑’의 삶이었다.
순종이란 매 순간마다 말씀하시는 성령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들은 것을 실천하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명하신 계명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신적인 삶, 사랑의 삶이다. 사랑은 성령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순간마다 식별하는 것이다.
16절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리스어 ‘Paraclito 파라클레토스’는 파라는 ‘옆에’라는 의미, 클레토스는 ‘불린자’로 ‘가까이 불렀다’라는 뜻이다. 라틴어는 ‘advocatus 아드보카투스’ 변호자, 보호자라는 뜻이다. 첫번째 보호자는 예수님이다. 그분은 제자들 옆에서 그들을 보호하셨다. 다른 보호자 성령께서는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신다.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영원히 동반해 주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의 자녀됨의 정신을 일깨운다.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삶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기도 하고, 길을 잃을 때도 있다. 이럴 때 내면의 항상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는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타일러 주시고, 용기를 주고, 위로해 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 주신다.
18절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고아 orfani는 부모를 여윈 어린 아이들을 말한다.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 외에 또 다른 선택에 의한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러분은 아들의 신분을 주시는 영을 받았기 때문이며, 이 영 안에서 우리는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이 경우 아들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육신의 부모로부터 받은 애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아들이나 딸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참조).
전과 다른 방법으로 오시는 주님은 본질적으로 삼위의 위격 전체를 포괄한다. 이 때는 영적으로 오시기 때문에 육으로 만질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분께서 내 앞을 지나가셔도 나는 보지 못하고 지나치셔도 나는 그분을 알아채지 못하네”(욥 9,11).
제자들은 3년 동안 물리적인 차원에서 예수님과 함께 지냈지만, 다시 오실 때는 전과 다른 방법으로 오시겠다는 약속이다.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은총을 통해 다시 오신 그분의 몸은 이미 영광 안에 있고, 그분의 영광 안에서 우리 또한 변화된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니 “ (필립 3,21).
19절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세속적이고 물리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무덤에서 끝나는 세상이다. “마음으로 관상하는 훈련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이 진흙에 파묻듯 마음을 육욕 안에 깊이 파묻은 육적인 사람은 진리의 영적 빛을 바라볼 힘이 없다.” (대 바실리우스) 여기서 살아 있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결국 사랑이 없다면 생명이 없다는 것이고, 생명이 없다는 것은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영원한 생명이 없는 식물과 같은 것이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랑이 없다면 영원한 생명이 없는 것이기에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20절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날: 요한 복음에서 그날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날은 사람이 숨을 멈추는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지만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갈아입으면서 새 생활을 시작한 그 때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꾼다. 예수님이 예언하는 새로운 시대는 스승과 제가가 맺은 외적인 관계가 아니라, 삼위의 하느님과 완전한 내적 일치를 이루는 친교를 누리게 된다. 이 친교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길이 곧 사랑이다. 이 사랑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 서로를 알아 보게 된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