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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 말씀(루카 24,13-35)
부활 제3주일(2020년 4월 26일)
루카 24,13-35
도입:
루카 복음은 85-90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루카 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제3세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시대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적이 없었던 그들은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루카는 이런 공동체 신자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루카도 그들과 같았기 때문이다. 루카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있은 지 10년이 지나서야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루카는 예수님을 뵌 적이 없고, 그분의 부활을 목격한 적도 없었지만, 사실 루카는 부활하신 분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른 사람이다. 루카는 자신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었는지 그 여정을 우리에게 소개하면 그 길로 인도하고 있다.
말씀 묵상:
13절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예루살렘과 엠마오의 거리: 한 스타디온 약 185미터, 예순 스타디온을 환산하면 11키로미터이지만,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다.
두 제자: 제자 두 명 중 한 사람의 이름은 클레오파스이다. 다른 제자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루카가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이유를 다양하게 추측하지만, 읽는 독자를 그 자리에 초대하기 위한 배려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을 자기가 경험한 체험으로 초대하여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루카의 의도일 수도 있다.
클레오파스와 다른 한 제자의 절망: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가 죽음으로 끝이 나버렸기 때문에 실망과 좌절의 위기를 맞이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제자 공동체도, 예수님도 거부했다는 말은 없지만, 공동체를 떠나 자신들 일상의 직업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좌절을 경험한다. 은총과 치유를 기대하며 기도했는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실망한다. 교회 공동체에서 상처를 받게 되면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 본업에만 충실해야겠다는 유혹도 받는다.
15절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이야기하다, 토론하다 두 동사가 사용된다. 첫째 ‘이야기하다’-일어난 사건에 대해 서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둘째 번역어 ‘토론하다’의 그리스 원어의 뜻은 – 서로 ‘싸우다’, ‘언쟁하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같은 문제로 함께 고통을 겪었고, 절망 상태에서 서로 책임전가를 하며 언쟁을 했을 수도 있다.
15-16절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갑자기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이 토론을 할 때도 그들 가까이 함께 걸으셨다. 두 제자는 육신의 눈으로 그분을 보았지만,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 보는 눈은 가리어 있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한 것은 스스로 인식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습을 감추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가리어 있었다. 여기서 사용된 그리어 ‘보다’ 라는 동사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두 가지 의미만 살펴보자.
블레포(blevpw): 육안으로 사물을 보고 인식한다는 뜻이다.
호라오(ojravw): 내면을 지각한 수 있는 영안을 뜻한다. 물리적인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는지 루카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7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을 건네신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시고, 꾸짖지도 않으시고, 탓을 돌리지도 않으시고, 주제를 바꾸어 묻지도 않으신다. 단지 그들이 토론하고 있는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도록 질문하신다. 그들의 나약함, 실망과 좌절을 없애지 않으시고, 표현하도록 유도하신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은 당신이 직접 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그 답을 찾도록 인도하신다.
19절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멈춘다.
루카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제자클레오파스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에 대해 좋은 말씀을 많이 하셨고,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예수님도 죽음으로 끝났다. 많은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의 외관만 알고, 훌륭한 의인으로 생각할 뿐이다. 부활하신 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믿음을 사실상 갖기가 힘들다.
22절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엠마오 제자들은 매우 심각한 두 번째 실수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의 증언을 검토해 보지 않은 것이다. 이 제자들은 믿음이 요구되는 부분을 처음부터 거부한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 봤다면 또 다른 차원에서 볼 줄 아는 시각이 열렸을 것이다.
25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라는 표현이 성경에서는 정신으로 쓰인다. 가려진 눈이 열리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빛은 예언자들의 말씀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는 나자렛 예수님의 사건을 반드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는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원하시고, 계획하신 것이 아니다. 오직 그 길만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27절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지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중요한 것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를 위해서 누군가의 설명이 있을 때 가슴이 달아 오르게 된다. 그러나 마음을 타오르게 하지 못하는 설명이라면 듣는 이의 눈을 열어줄 수 없고, 믿음을 갖게 하지 못한다.
29-30절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 대목은 주일날 우리 공동체에서 거행하는 미사와 같다. 루카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상황을 전하면서 어떻게 우리 눈이 열릴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날에 공동체와 함께 있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복음이 마음을 타오르게 하여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다.
31절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떼어 주시는 빵은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되기를 바라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전부를 내어 주셨듯이 우리도 신랑이신 예수님에게 우리 존재 전부를 내어 주도록 일치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렇게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는 교회는 오직 사랑의 계획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타오르게 된다. 그들이 깨달음을 통해 영혼의 눈이 열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보게 되었을 때 그분께서는 사라지셨다.
그분께서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이는 제자들이 깨달음에서 깨어나면서 그들의 육신의 눈으로 그분을 보려고 하는 순간 예수님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32절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주의할 것은 예수님께서 사라진 것에 대해 제자들은 어떤 반응도 없고, 놀라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마음이 타오르는 체험을 하면서 부활하신 분을 영적이 눈으로 보았고, 마음에 모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