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수) 성 김대건 신학생의 네 번째 편지
< 이 서한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영성 : "하느님의 자비하신 안배" >
메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예정대로 에리곤호로 우리의 선교지 조선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였으나 세실 함장은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여행 예정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가는 항해를 망설였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의 질문에, 조선을 향하여 항해하기는 하겠으나 만일 항해 중에 어디서든지 역풍을 만나면 곧바로 마닐라로 뱃머리를 돌릴 것이라고 조건부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처한 딱한 형편에 메스트르 신부님은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우리가 마닐라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봐 근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세실 함장이 돛을 펴서 출범하려 할 때 마침 범 요한이 돌아와, 당시 상해 근처에 체류하던 산둥 지방의 강남 직할 서리구장이신 존경하올 베지 주교님께서 짐 보따리에 대해 조치하신 경위를 신부님께 보고하였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신부님은 더 안전한 편을 취하기로 하고 저와 함께 황세흥씨 집으로 갔습니다. 그 때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범 요한과 토마스를 데리고 그 근처에 정박해 있던 영국 군함을 타고 의복을 변장하여 베지 주교님께로 급히 갔습니다.
우리는 그 외교인 집에서 5일 동안 묵은 다음 같은 군함에 올라가서 숙박을 청하니 그들은 우리를 매우 환대하였습니다.
하루를 지낸 후 우리는 주교님으로부터도 환대를 받았고 주교님의 알선으로 어떤 신자의 배를 타고 약 15일 걸려 우리가 향하던 태장하에 입항하였습니다. 이 항해 중 역풍으로 두세 번 출범하였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 외에 별다른 역경은 없었습니다.
- 네 번째 편지 요동(백가점)에서, 1842년 12월 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