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제자수녀의 창작 콘텐츠로 도와드립니다!
전례자료실
부활 제4주일(요한 10,1-10)
부활 제4주일(2020년 5월 3일)
요한 10,1-10
도입
제목이 목자의 비유라고 되어 있지만, 우화와 비유가 혼합된 “수수께끼enigma같은 비유”로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지 계시하는 말씀이다.
말씀하신 때는 22절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초막절이다. 예수님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은 믿지 않는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예수님의 9장의 이 말씀이 그대로 10장 6절에서 드러나게 된다.
청중: 10장 1절 너희에게 말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주랑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종교지도자들 곧, 바리사이와 대사제들이다.
말씀묵상
1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양 우리: “recinto”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aule 아울레 집회 천막 앞, 또는 성전 마당 앞의 영역을 나타낸다. 양 우리는 백성들을 가르치는 종교기관을 의미한다. 목자에게 양우리는 안뜰(정원)과 같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문: 여기서 문은 ‘성경’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 주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넘어 들어가는 자: “올라가다”의 뜻으로 ‘문’과 정반대되는 불법을 뜻한다.
도둑이요 강도: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들이다. 이들은 합법적인 입구를 이용하지도 않고, 율법 계명을 존중하지도 않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자기 식으로 가르친다. 종교지도자들은 담으로 넘어 들어가서 거짓된 하느님의 이미지를 양들에게 심어준다. 종교지도자들은 단순한 백성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을 주고, 전통과 관습이라는 양 우리 안에 백성들을 가두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지도자들의 부패를 고발하고 있다.
2절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의 이미지는 고대 근동지방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왕들을 목자로 표현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보면 어떤 왕도 착한 목자로 언급되지 않고, 악한 목자로 묘사된 경우가 있다. 그들은 양들을 돌보지 않고, 자신만을 돌보면서 양들을 착취하고, 흩어 버리고, 죽이는 악한 목자다. (에제 34,1; 예레 23,1 참조).
구약성경에서 목자는 오직 하느님이고, 메시아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 23).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야 40, 11).
3절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문지기: 문은 말씀, 그리스도이고, 문을 열어 주는 분은 성령을 가리킨다 (아우구스티누스).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목자와 양들의 친근하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친교의 관계를 말한다. 문이 말씀이기 때문에 온 마음으로, 온 정신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에 대해 성령께 질문하면, 문지기 성령께서 그 문을 열어 줄 것이다(오리게네스의 편지 참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데리고 나간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는 말씀은 이사야 43,1절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를 기억하게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양들 하나하나를 알고, 그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양을 먹이고, 인도할 만한 진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데리고 나가다: ‘나가다’ 라는 동사는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과 자유로 나가는 것, 닫혀진 공간에서 아주 넓은 공간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4절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양 우리에서 밖으로 데리고 나간 목자는 양들과 친근하고 개별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깊은 신뢰 관계를 형성해 간다.
목자는 양들의 우리가 마치 빛과 생명이 없는 심연과 같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양들을 당신의 복음으로 이끌어 내고자 한다. 양 우리는 마치 주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의 사고방식과 같다.
첫째, 진정한 신앙 생활이 아닌 관습적인 종교적 실천이 곧 양 우리다.
둘째는 지배자, 주인, 법관 같은 하느님의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 주는 것. 셋째 세속적인 성공과 명예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삶의 중심 자리에 놓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다. 돈과 권력과 성공과 명예를 위해 살아간다면 사실 노예생활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가장 심각하고 일반적인 감옥은 양심의 가책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과거를 묻지 않으신다. 과거는 우리 마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주님을 우리를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도록 초대하신다. 후회는 스스로를 괴롭힐 뿐이다.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살고 있다. 이 감옥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내면의 감옥을 제거하고 더 아름다운 자유와 해방으로 데려가길 원하신다.
7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예수님은 ‘나는 양 우리의 문이다.’ 하지 않으시고,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양들에게는 끝없이 아름답고 넓은 자유를 향한 인도자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나는 양들의 문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양들은 문인 예수님을 통과하여 건너가야 한다. 양들의 문인 예수님을 건너간다는 것은 자유로운 복음의 세상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복음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아름다운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게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사람은 본능의 노예다. 공관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초대하신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루카 13,24). 좁은 문은 바로 예수님이고, 말씀이다. 자신을 버리고, 원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의 좁은 문이다. 참된 인간다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이다. 오직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세상이다. 이 외에 다른 모든 삶의 제안들은 단지 죽음의 심연으로 추락하게 만드는 올가미이고, 덫에 불과하다.
8절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예수님 보다 먼저 온 사람들 중에는 성조들도 있고, 예언자들도 있었다. 이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주님보다 먼저 온 자들이란 불성실하고 더럽혀진 영혼으로 양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가르킨다. 그들은 영혼을 훔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믿음이나 삶에서 복음의 영향을 받지 못하고, 복음을 이용만 한다. 말씀의 기쁜 소식을 본디 의도되었던 바와 다르게 사용한다. (오리게네스)
9절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드나든다: 문은 하나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다. 한 방향은 하늘에서 인간을 향하고, 다른 방향은 인간으로부터 하느님을 향한다. 말씀의 문,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해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가고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온다. 말씀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주고받는 관계를 말한다.
또한 ‘들어가다’는 것은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적 명상에 들어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나간다’는 것은 그 일치에만 머물러 있는 상태가 아니라 행위의 실천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베르나르도)
10절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도둑으로 인해 위협, 멸망과 죽음이 야기되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생명이 넘치게 된다. 생명을 얻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즉 말씀과의 관계성이다. 관계가 있다면 생명의 빛을 얻기 때문에 내면에 생명의 빛이 넘치고, 생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