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수도원 소식
+ 마리오 수사님의 장례미사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월 24일 새벽 1시 40분(로마시각),
마리오 수사님께서 향년 91세의 일기로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64년 전쟁의 아픔으로 가장 가난하던 시절 31세에 한국에 오셔서
2011년 7월 13일 이탈리아로 돌아가시기 까지 47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 곁에 계셨고,
한국을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마리오 수사님을 위한,
특별한 기도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2월 26일, 그렇게 사랑하시던 성모님의 토요일,
마리오 수사님께서 마지막으로 머물러 계시던 로마,
창립자 신부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었던 크립타 성당에서 장례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강론은 브루노 수사님이 해 주셨습니다.
이곳 한국 상바오로수도회 공동체에서도, 같은 마음으로 위령미사가 봉헌 되었습니다.
미사중에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마음이 담긴 편지가 올려졌고,
한국의 첫 회원이신 벨라도 수사님과 신자는 아니셨지만 수도원의 기초를 함께 닦아주신
곽형제님께서 수사님에 대한 기억을 나눠주셨습니다.
+ 프란치스코 마리오 메체네로 수사님(1932-2022)
마리오 수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맨 처음 떠오른 것은 이제 한국 공동체를 일구었던 선교사들이 모두 떠나셨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바오로 마르첼리노 신부님, 알도 갈리아노 신부님 같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신 지는 이미 오래 되었고 수사님만 한국 공동체 초창기의 유일한 증인으로 남아계셨으니까요. 프란치스코 마리오 메체네로 수사님이 한국에 도착하신 해는 1964년이었습니다. 공동체가 설립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때였어요. 한국전쟁이 끝나고 겨우 10년이 지난 한국은 지독하게도 가난하던 나라였습니다.
마리오 수사님이 제대로 된 교육기관에서 한국어를 배우지 못하고 수도원 건물을 짓는 인부들 사이에서 우리말을 배우게 된 연유입니다. 덕분에 수사님의 한국어는 매우 독특한 것이 되어서 가끔씩 우리 형제들을 웃음 짓게 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 특유의 몸짓으로 손을 모아 흔들며 “쇼가나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마리오 수사님의 상징처럼 되었지요.
수사님은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는데 의사의 말은 “살려면 당신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다른 음식과 언어, 문화 때문이었는데 무엇보다 음식이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수사님은 수도원 뒷동산에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주를 담그셨고 토끼를 키워 단백질 보충을 할 방도를 찾으셨어요. 또 근처 산에 염소를 키우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가서 무작정 허술한 집을 수리를 해주셨답니다. 집 주인이 고마워하면서 “무얼 해 드릴까?” 하고 묻자 옆에 있는 염소 한 마리를 손으로 가리키셨다고 해요. 그렇게 데려온 염소의 젖을 짜서 마셨습니다.
한국 공동체의 시작은 창립자 신부님의 말씀대로 구유에서 시작하는 것이었고 마리오 수사님은 묵묵하게 그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수도회의 첫 번째 집은 1965년에 지어졌는데 수사님은 시내 중심부에 있는 서울역 근처에 가서 공사 자재를 사다가 손수레에 싣고 당시에는 시외였던 수도원까지 나르셨다고 해요. 그렇게 시작한 수도원이 지금은 한국 전역에 일곱 군데의 공동체로 성장했습니다. 늘 시간을 아껴 일하셨고 굳은살이 박인 손에서 묵주가 떠나지를 않았지요. 성모님을 무척 사랑하셨고 저희에게 늘 묵주기도 바칠 것을 권하셨습니다. “매일 성모님께 자기 성소를 맡겨드리면서 묵주 다섯 단을 기도하면 성소를 절대 잃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선교사로서의 삶이 수사님에게 가르쳐준 것이었겠지요.
“일을 부탁할 때는 항상 바쁜 사람한테 부탁해야 해요. 바쁜 사람은 시간을 쪼개어서 도와주겠지만 한가한 사람은 ‘나 바빠요!’하고 안 도와주거든요.” 수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몸으로 배운 이 지혜는 정말 옳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으로 시간의 청빈을 배웠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윗자리에 서는 일 없이 늘 낮은 자리에서 숨은 일을 하시는 수사님을 형제들은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마리오 수사님처럼 살고 싶어요.” 말하던 형제 하나는 지금 페루-볼리비아 준관구에 선교사로 가서 살고 있습니다.
수사님은 연세가 드시면서 한국 공동체에 부담이 되는 것을 늘 걱정하셨는데 결국 2011년 47년간의 한국 생활을 정리하시고 이탈리아로 귀국하셨습니다. 마리오 수사님이 한국에 파견되었다는 말을 듣고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님에게 갔을 때 창립자 신부님은 “살아서 다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한국을 사랑하라고 부탁을 하셨답니다. 창립자 신부님은 약속을 지키셔서 마리오 수사님은 알베리오네 신부님을 다시 뵐 수가 있었습니다. 마리오 수사님도 창립자 신부님의 말씀을 지키셨습니다. 한국을 사랑하셨고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리오 수사님! 수사님은 늘 저희 마음속에 살아계실 거예요. 수사님이 삶으로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을 저희도 지키고 다음 세대에게 전하겠습니다.
이제 하늘나라에 가셔서 창립자 신부님도 만나고 마르첼리노 신부님도 만나시면 살아온 이야기들 반갑게 나누시겠지요. 그곳에서 저희 한국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저희도 수사님을 늘 기억하겠습니다. 수사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022년 2월 23일, 서울
한국 준관구 공동체 형제들 올림
성바오로수도회(https://paolo.or.kr) 제공
그렇게 묵주기도를 사랑하시던 수사님의 사진은 성모님 발치에 모셔졌습니다 ^^
+ 마리오 메체네로 수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한국을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마리오 수사님,
우리 수사님들을 위해 복된 전구자가 되어 주세요~!
사랑하는 수사님!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아름다운곳으로 아름답게 떠나신 수사님!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영원히 영복을 누리소서!!! 아멘
사랑하는 마리오 수사님
지상에서의 모범된 삶 처럼
천국에서 한국 바오로 가족과 성소자들을 위해 전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