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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일(요한 14,1-12)
부활 제5주일(2020년 5월 10일)
요한 14,1-12
도입
요한복음 14장 말씀은 부활 시기에 낭독된다. 내용은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에서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의 유언과 같다. 유언장은 말씀하신 분이 돌아가신 후에 그분께 대한 최대의 사랑과 존경을 드리면서 받아들이는 자세로 읽게 된다.
14장의 첫 구절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는 저자 요한이 이 내용을 기록하던 시대적 배경을 암시하기도 한다. 요한은 50-60년 사이에 복음을 기록하였는데 그때 당시 소아시아는 본격적인 박해 상황은 아니지만, 사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였고, 공동체를 떠나는 사람도 있어, 요한 공동체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도록 공동체를 초대하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수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믿음에 도전을 받고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말씀묵상
1절 “저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산란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tarasso타라쏘'는 성난 파도 같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과 예수님의 이별,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은 풍랑을 만난 사람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놀라지 말고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라고 명령하시고 안심시키신다. 교회 공동체도 개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내외적으로 신앙의 도전을 받을 때 성난 파도를 만나는 것과 같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이 복음을 읽어보자. 예수님은 이런 공동체를 안심시키고자 한다. 모세도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모아놓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신명기 32, 29참조).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예수님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셨다. 늑대들이 사는 세상에서 이제는 양들이 사는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시작하신 이 일을 제자들을 통해 계속하시길 원하신다. 제자들의 두려운 마음을 이해하시면서 그들에게 믿음의 강력한 힘에 매달리라고 명령하신다. ‘믿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분의 삶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믿음은 날이 크고 단단한 무기와 같다. 믿음은 다가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모든 소심함을 몰아낼 수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2절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이 말씀은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 가신다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요한복음 2장 성전 정화에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요한 2, 16절). 그러므로 성전은 아버지의 집이다. 그럼 예수님께서 마련하러 가겠다고 한 자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모두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인격 안으로 들어가도록 초대받았다. 주님의 거처는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는 말씀은 거처에 살 사람들을 준비시킴으로써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는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향기가 있다. 하느님은 순 나르드 향유를 좋아하신다. 순 나르드 향유는 이웃을 향한 사랑을 상징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모두의 자리가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신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다양성은 너와 나의 차이와는 다르다. 부자와 가난한 자, 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 권력을 차지한 자와 소외된 자의 차이는 서로 다름을 잘못 사용하여 생긴 인간의 일그러진 작품이다. 그러나 서로 다름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고, 이 선물을 서로 나누며 살도록 계획하신 것이다.
우리가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아름다움으로 채워져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서 필요한 것을 찾고, 나누고, 교환하면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계획하셨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선물을 형제들과 나누면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사랑의 교환이 거룩한 삶을 실현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상징인 순 나르드 향유 향기가 풍기는 집, 각자가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순 나르드 향유를 형제자매의 머리에 부어 충만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서로 나누는 사랑은 그 누구도, 무엇도 구별하지 않고 행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나눌 때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바쳐 이 공동체를 만드셨고,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첫 인물이시다.
3절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는 길의 목적지가 이미 제자들에게 알려져 있음을 뜻하고 그 길이 또한 제자들이 가는 ‘길’임을 암시한다.
유다인들에게는 율법이 ‘길’이었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께 소속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이 곧 ‘길’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간 것이다. 엄청난 변혁이었다. 구원의 완성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이 새로운 ‘길’인 예수님의 전 인격에 초대되고 있다.
5절 토마스가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토마스는 예수님이 간다고 한 그곳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토마스는 아직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것의 끝은 죽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예수님 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갔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죽음을 향해 갈 뿐이다.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전체 성경 말씀의 정점이다.
나는 길(hodos)이다: 길은 예수님 자신이고, 그분의 인격이며, 생명의 말씀이 곧 길이다. 신약성경에서는 길이라는 단어가 번역에 따라 문맥에 따라 길, 도리, 도래, 가르침으로 번역되어 있다. 바오로 사도의 1코린 13장에 의하면 ‘가장 훌륭한 길’, ‘가장 뛰어난 길’로 사랑을 가리키고 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분과 하나 된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을 공유하고 있는 이 길은 이미 하느님 아버지의 집 출입문과 같다.
나는 진리(aletheia)이다: 감추어진 보화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진리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마태 13, 44) 인생에서 무엇이 우선인지, 자신의 전부를 주고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꿈꾼 사람의 원형이기에 참사람이고, 진정한 사람이며 완전한 하느님의 모상이고, 하느님의 얼굴이다.
나는 생명(zoe)이다: 하느님의 신적 생명이 예수님께 넘쳐흐르고(1, 4; 5, 26) 예수님께서는 이 신적 생명을 믿는 이들에게 베푸신다(5, 21. 25; 6, 27). 신앙인들이 누리는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6, 41, 51), 충만하며(10, 10), 영원하다(17, 2). 이 땅에서 이미 부활의 삶은 시작되었고 완성의 날에는 생명이신 하느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충만에 이를 것이다. 인간은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믿는다. 이 말씀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그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알게 된다.
또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요한1, 4). 이 빛이 하느님 신비의 영역을 알게 해 주는데, 이 앎은 변화와 성숙의 과정을 걷기 때문에 신비롭게도 자신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만큼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노력과 은총이 어우러져야 그 앎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자신의 본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다.
“길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실 것이고, 진리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생명 안에 세우실 것이다”(힐라리우스).
7절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대답한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갈망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원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느님을 뵙기를 갈망한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며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시편 27, 8-9).
우리는 가끔 영원에 대한 욕구를 세상 것으로 채우고자 한다. 세상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 성공, 재산 등을 게걸스럽게 탐욕하면서 내면의 갈망을 채우고자 하지만, 내면은 충족되지 않는다. 인간은 오직 영원하신 하느님의 얼굴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방향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9절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10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일치, 상호 내재를 계시하신다. 이 구절에 대한 여러 교부의 해설에 의하면 인간처럼 나약하고 육적인 몸 안에 사는 인간 이성의 탐구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결코 찾을 수도 없고, 알아차릴 수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일치 신비를 알려주셨다고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본성이 같고, 말이 같고, 행위가 같은 완벽한 통교와 일치를 이미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이다. 제자들이 본 예수님은 너울이 덮이지 않은 그분의 본질이 아니라 육을 입으신 그분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눈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것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관상하면서 참된 하느님에 대한 지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하느님을 뵐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완벽한 모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을 묵상하고 관상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알고자 한다면 하느님을 닮은 진정한 얼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그럼 무엇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가? 이 길은 그분의 말씀인 복음을 묵상하고 관상하면서 하느님의 지식에 이르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지적 인식은 초자연적인 빛이며, 이 빛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 있다.
11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하느님은 어떤 논리적인 이론이나 개념으로 당신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손을 잡아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 하느님의 빛나는 모습이 충만하게 드러나고, 갈바리오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게 드러난다. 십자가 죽음은 생명을 선물하는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다.
실제 우리의 모든 행위가 신적인 생명을 주는 사랑인지 아닌지를 식별할 수 있는 길은 상대방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랑을 지향하면서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모두가 기뻐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행복을 위한 유일한 법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사랑의 모습은 세상이 어떤 박해를 하여도 또 죽이기까지 할지라도 세상을 향해 온몸으로 보여주신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이다.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의 절정은 십자가 위에서 계시되었다.
12절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믿어라”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된다. 믿는 사랑의 기준은 ‘내가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 안에 진리의 성령이 와서 상호 주체적 내재가 이루어지면 아버지 뜻에 따라 사람을 살리고 제때에 양식을 주는 이가 된다(마태 5, 16; 7,21).
성찰과 결심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겠다”는 말씀은 참사랑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참사랑은 하느님의 이름이고, 얼굴이며, 현존의 장소이다. 자신 안에, 가정 안에, 공동체 안에 참사랑이 있는지 살펴보자.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없다면 무엇이 원인인지 예수님 말씀의 빛으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