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연중 제 22주간 금요일 ) 성 김대건 신학생의 일곱 번째 편지
2주간 - 같은 그리움을 지닌 이들의 도움 : 진흙 길에서 만난 손길
< 이 서한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영성 : "하느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입니다." >
12월 23일에 메스트르 신부님이 안배하신 대로 4일이 걸려 아무런 장애 없이 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에서 온 연락원 김 프란치스코는 벌써부터 변문에 도착하여 여러 날을 머무르면서 우리와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인 안내자들이 오지 않을 줄로 알고 외교인 친구들의 호의와 후원으로 그들을 수행하여 중국에
들어갈 허가를 얻어, 북경으로 들어가는 일행 명단에 올라 조선 임금님이 보내는 사신 일행과 함께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안배로 변문에서 멀지 않은 길거리에서 사신 일행과 함께 가는 그를 만났으나 저도 그를 모르고 그 역시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8년 전에 단 한 번 서로 만나본 일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에게 교우냐고 물었더니, 그가 자기는 교우이며 본명은 김 프란치스코라고 대답하였으므로 저도 그에게
비슷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에게 북경행을 중지하고 변문으로 되돌아가서 선교사 신부님을 담당 선교지인 조선으로 인도하여
드릴 방도를 의논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면 외교인 동료들이 수상하게 여길 것이고, 따라서 박해의
위험이 없지 않으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장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든 노력을
다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마지막으로 그에게 어째서 여러 해 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첫해(1939)에는 배반자들의 음모가 무서워서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고, 그 다음
해에는 연락원을 보냈더니 도중에 객사하고, 두 번째 보낸자는 변문까지 가기는 했으나 중국인 안내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대로 되돌아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프란치스코가 변문에 왔지만 중국인 안내자를 만나지 못해서
자기가 북경까지 들어갈 작정이었다고 합니다......그러나 주변사정이 허락지 않아 그 밖의 소식을 더 오래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 요동(백가점)에서, 1843년 2월 16일 -
성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에 나타난 신학생 시절, 조선으로 선교사 영입을 하기 위해 활동하신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상황들이
현대의 첩보 작전을 보는 듯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부님의 용덕이 절실한 때, 위험을 감수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며 온몸과 온마음을 다하는 신부님을 본받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