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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사순 제 4주일 전례 말씀 묵상
(예수님 무덤 성당 내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 제대)
나해 사순 제4 주일
1독서: 2역대 36,14-16.19-23
2독서: 에페 2,4-10
복음: 요한 3,14-21
오늘은 기쁨의 주일입니다. 그래서 보라색 제의 혹은 분홍색 제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제대에 꽃 장식이 가능하며 미사 중에 악기도 사용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는 입당송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짧은 문장에 즐거워하여라, 기뻐하라는 단어가 각 각 두 번씩 반복됩니다.
제1 독서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펜데믹보다도 더 극심한 상황을 보게 됩니다. 불태우고, 허물며 남의 나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국민들의 모든 소유권이 남의 나라에게 넘어갑니다. 개인의 자유, 가치가 없어지고 맙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지도 사제들이며 백성들이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을 크게 배신하여 온갖 역겨운 짓을 하고 성별하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별이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영역입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 왕도 사울 왕에게 미움을 받고 자신의 목숨을 잃을 뻔 했고,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습니다. 하느님이 성별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2사무 26,9 참조) 이러한 것을 인간들이 침해한 것입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당신 처소를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보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도 백성들의 마음은 열리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비웃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주님의 분노가 당신 백성들을 향해 타오릅니다. 구제할 길이 없다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불태우고, 성벽을 허물었으며, 궁들을 모두 불에 태우고, 기물도 모두 파괴하였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바빌론으로 유배시켜 종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왕은 어명을 내리고 칙서를 반포합니다. 왕은 하느님께서 주신 권한을 이용해 종이 되었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었습니다.
백성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택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왕의 마음을 움직여 해방을 선포합니다. 자유를 선포합니다. 희망을 심어줍니다. 열정을 심어줍니다.
2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풍성하심을 말합니다.
1독서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이루신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2독서는 1독서에서 보여 준 구약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지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당신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은 다름 아닌 당신 외아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잘못을 저질렀던 우리,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던 절망들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둠에 있는 이들을 직접 찾아가 치유의 빛으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의 병으로 신음하는 이들을 찾아가 낳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방문해 일으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 이들에게 쾌유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질적으로 병들어 있는 이들을 만나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베푸신 호의입니다. 사랑입니다. 자비입니다. 이 얼마나 크신 하느님의 은총입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에게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태어난 것은 하느님이 우리가 선행을 하도록, 선행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상황도 나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상황을 뒤엎기도 하십니다. (창세 6,7 참조) 하느님께서는 시험도 해 보십니다. (창세 22,1)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나쁘게, 완강하게도 만드십니다.(탈출 10,1)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을 당신 곁에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일에도 스케마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경의 모든 구원 역사는 이 하느님의 스케마에 의해서 전개되어있고 완성되어 갑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스케마에서 2단계 해당되는 부분을 강조합니다. 2단계란 하느님께서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들(1단계)에게 당신 아들을 보냅니다(2단계). 그러므로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3단계) 하느님이 당신 아들을 통하여 인간들을 구원하러 오셨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4단계)
우리 인간들은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살아갑니다. 악에도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악에 놓아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구하기 위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당신의 아들 예수를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백성들과 세상을 사랑하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구하려 하십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축복과 선물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멸망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당신 백성들이 받는 하느님의 분노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은 참혹한 방법으로 죽음으로써 인간들을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 도구를 요한 복음에서는 ‘빛’이라고도 칭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우리를 비추러 왔습니다. 하느님은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당신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을 선택합니다. 빛을 미워하도록 만듭니다. 빛 속에서는 자신의 행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빛을 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때,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허전함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생각되는 것들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예수님의 방법을 모르고 선택한 자신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감지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허락합시다. 누군가가 나를 빛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은 느끼는 삶을 알아 볼 수 있는 자기 자신만의 시간을 배려해봅시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인간 예수를 이 땅 위에서 동반하셨듯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나 자신이,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배려하는 시간을 마련해 보도록 합시다. 자연과 공간 안에 떠 있는 “하느님의 좋으심”이 내 안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열고, 나의 정신을 집중하고, 나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는 ‘나의 터’를 더 크고 넓게 마련해 나갑시다. 파스카를 준비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파스카의 자리’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