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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대림 제4주일 다해 전례 말씀 묵상
사진: 마리아 엘리사벳 방문 성당 - 아인 캐램
대림 제4주일 다해
제1 독서 미카 5,1-4ㄱ
제2독서 히브 10,5-10
복음 루카 1,39-45
대림 제 4주일입니다. 대림 제4주일인 오늘 미사 입당송을 보면서 지난 대림 주일들과 너무 달라진 전례 말씀을 발견하였습니다. 특히 대림 제1주일 복음말씀은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대림 제 1주일 복음 루카 21,25) 복음 말씀만 단순히 생각하면 공포와 불안에 싸인 모습들만 상상되었었습니다.
대림 4주일인 오늘 입당송은 대림 제1주일과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구름에 그리고 땅에 외칩니다. 희망의 외침입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미사 입당송 : 이사야 45,8) 주님께서 이 외침을 통하여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를 향해 “주님”이심을 증명하십니다.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이사야 45,5)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이사 45,7)
우리가 기다리던 대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대림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 증명해주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며 처음(대림 제 1주일)에는 불안하고, 초조하고 무서웠습니다. 우리 주위에 나타나는 표징들은 우리의 모든 희망을 절망으로 몰아넣었었습니다. 그리나 시일이 지나면서, 성탄이 가까워 지면서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가 있었습니다.
이번 대림 제4주일 복음에서는 성령으로 인한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두 여인의 만남을 보게 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입니다.
엘리사벳은 루카 복음에만 등장합니다. 마태오(3장)와 마르코(1장)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부터 다룹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대하여 다루지 않습니다.
반면 루카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 뿐 만 아니라 그의 부모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루카 복음에 의하면 마리아의 사촌인 엘리사벳은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 즈카르야의 아내이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루카 복음서 1장에 따르면, 엘리사벳은 사제 아론의 자손으로 남편과 함께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도록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을 뿐 아니라 부부가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 이미 임신한 지 여섯 달이었습니다. 이 임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표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몇 명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세 16,11),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창세 25,21),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엘 1,2), 마노아의 아내(판관 13,2) 그리고 즈카리야의 아내 엘리사벳(루카 1,7)입니다. 유대 전통 사회에서 여자가 결혼하여 자손을 낳지 못한다는 것은 고통과 슬픔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이미 아기를 낳을 수 없을 만큼 늙어버렸습니다.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리야는 그녀가 이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어떠하였을까요? 그녀는 사제 가문의 출신이며 그의 이름처럼 하느님은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 하느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믿고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대에도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기대하며 사제 가문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거룩함과 경건함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손에 대한 축복은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손에 대한 ‘태’를 닫으시면(창세 20,18 ; 1사무 1.5) 그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언제나 먼저였고, 하느님은 당신 뜻에 합치한 경건한 사람만을 찾아 오셨습니다.(집회 11,17 ; 집회 43,33) 엘리사벳이 늙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된 것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을 통해 이루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경건함과 의로움이 하느님의 뜻에 합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여인은 잉태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거룩한 비밀입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알려진 여인인데 늙어서 아들을 잉태했고, 마리아는 처녀로써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되는 여자였는데 잉태를 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비밀을 두 여인은 간직합니다. 엘리사벳은 잉태한 아이에 대한 남편 즈카리야의 말을 믿고 출산까지 운둔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운둔생활을 하는 엘리사벳을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찾아옵니다.
엘리사벳은 갑작스런 마리아의 방문을 큰 기쁨으로 맞이했고 성령의 감동으로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주님의 어머니께서’라고 고백합니다. 주님(κύριος)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그녀의 집에 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집에 방문하는 것과 같은 감동과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복음의 소식을 외칩니다. 41절과 44절에 모두 인사말을 들을 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고 강조합니다.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이 그 어머니 태중으로부터 이미 성령으로 가득찬 것(루카1,15)이 성취됨을 의미합니다. 지금 두 여인의 만남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보면 단순한 두 임산부의 만남처럼 보이지만 성령의 활동으로 인한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그 길을 소개하는 것(대림 제2주일 복음)이었습니다. 요한은 후에 그런 자신을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라고 했습니다. 지금 그 소리와 소리의 실체가 되신 분이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이 구약과 신약의 분기점이 됩니다. 요한은 구약을 문을 닫는 마지막 사람으로, 예수님은 신약의 문을 여는 첫 분으로 등장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의 핵심입니다. 목수의 아내인 마리아와 사제의 아내인 엘리사벳을 통해 ‘구원의 빛’이 드러나고 있음을 밝혀줍니다.
요한이 태중에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뛰어 놀 때에 엘리사벳도 함께 성령으로 충만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큰 소리로 외치게 합니다. 새로운 소식입니다.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을 통해 구원이 자기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증명되는 “구원자, 메시아”에 대해 들어보는 ‘첫 소리’입니다. 이처럼 대림 제 4주일 복음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엘리사벳의 외침입니다. 그녀의 외침은 우리 마음속에 울려 퍼질 것이고 우리는 이 구원의 소식이 우리 각자의 역사 안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소식은 4가지 입니다. ①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됩니다. ②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③당신의 인사 말 소리가 제 귀에서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④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여기서 ① ~ ③ 은 성령의 활동으로 인해 인간에게 이루어지는 결실입니다. 반면 ④은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낳은 열매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어떠한 사건이나 상황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능동적이고 긍정적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성령 안에서의 만남입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만남입니다. 희망을 키워 주는 만남입니다. 신뢰를 확인하는 만남이요 기쁨을 나누는 만남입니다.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만남도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다듬어지고 변화되어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루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