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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대림 제3주일 다해 전례 말씀 묵상
대림 제3주일 다해
제1 독서 스바 3,14-18ㄱ
제2독서 필리 4,4-7
복음 루카 3,10-18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미사를 통해서 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장미색 제의를 착용합니다. 그래서 장미주일 이라고도 일컫습니다. 미사 전례 말씀도 기쁨과 즐거움의 환호를 반복합니다.
또한 제대 앞에 놓인 네 개의 대림초 가운데 오늘은 세 번째 대림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분홍색입니다. 지난 대림 제2주일까지 두 개의 보라색 초가 먼저 켜지고, 오늘은 세 번째 초인 분홍색 초가 켜졌습니다. 분홍색 초를 밝히면서 아기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음을 기뻐합니다.
오늘 1독서와 2독서에서도 기쁨을 노래합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전쟁에 시달리는 예루살렘에게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고 하고, 사도 바오로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아기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왔고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 기쁨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해 자선주일로 지냅니다.
복음은 지난 대림 제2주일 시작했던 세례자 요한의 설교가 계속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8절)입니다.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7절-9절의 요한의 말에 두려움을 느끼고, 참된 회개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이 질문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질문들과 답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3장 처음에 말한 데로 유다는 로마의 속국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기 위해 율법과는 관계 없이 자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 섬김을 실천하라고 설명합니다. 본문에서 옷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키톤’은 기다란 겉옷 ‘히마티온’ 안에 입는 옷을 가리킵니다. 따뜻하게 하려고 한 벌의 속옷을 더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마르 6,9 참조) 그 것은 속옷을 입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입니다.
두 번 째 질문을 한 그룹은 세리들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세리들이 나왔다는 사실도 놀라운 것인데 이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묻습니다. 이들은 로마로부터 세금징수를 하청 맡은 사람들로 부과한 금액 이상의 세금을 징수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루카 19,7 참조)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하수인처럼 보이는 것만으로도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는데 세금을 더 많이 징수함으로 이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감정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럴수록 이들은 더 많은 세금을 짜내기에 바빴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고 정한 세금 외에는 더 받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14절에 군사를 나타내는 헬라어 “스트라튜오메노이”는 아마도 로마 군사가 아니라 국내 정세를 담당하는 유대의 군사들을 언급하는 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리의 징세 업무를 도와 약탈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습니다. 이들은 강압적 수단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강탈해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웠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받는 금료에 대해서 만족한 줄을 알라고 말합니다. 그 직업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충실하라고 합니다.
다음은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라는 말은 '백성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등장해서 활동을 하자 혹시 그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자신은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가 과연 메시아인가에 대해 많은 논란을 벌였고, 당시에 요한을 메시아로 받든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합니다. 근동에서는 대체로 맨발로 다니거나 샌들을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실내로 들어가거나 금식 등을 할 때는 샌들을 벗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이 주인이나 주인의 방문객들의 신발을 풀고 묶어주며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은 가장 낮은 노예의 의무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모습을 노예처럼 낮게 내려 놓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은 메시야가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기 전까지 예비적인 특성을 갖습니다.(루카 3,1-20 참고) 세례자 요한은 이러한 세례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에는 성령이 내리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는 성령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는 '물의 세례'이고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이고,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입니다. ‘불의 세례'는 일차적으로는 심판을 뜻합니다. 즉 불의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말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입니다. 또 '성령과 불의 세례' 라는 말에는 성령과 불이 물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의 죄를 깨끗이 제거해줄 것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며 동시에 심판하시는 분이기도 하다는 뜻이 됩니다.(사도 40,3 ; 에제36,25-27) 그러니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꺼지지 않는 불은 일반적으로 영원한 심판을 의미합니다.(욥기 20,26 ; 이사34,9 ; 이사66,24 ; 마태5,22 ; 마태13,42) 또한 영원한 심판과 멸망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욥기20,26 ; 이사34,9. 10,66 ; 마태5,22 ; 13,42 ; 마르9,43-48). 요한의 이 경고는 매우 엄중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심판이란 자신들과 무관하고 오로지 이방인들에게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제시 한데로 하느님을 간절히 찾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매일 아침에 성전에서 번제가 행해졌는데 즈카리야가 대표로 성소에 들어가자 모든 백성이 기도했다(루카 1,1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보면 (이사40,3 ; 에제키엘36,25-27 ; 요엘2,28-29) 성령은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불의 심판과 새롭게 함이나 정화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 점을 미루어 볼 때 본문에서도 성령과 불은 이러한 복합적 의미로 쓰인 듯 합니다.
루카 복음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인자로서 완전하고 대표적인 삶을 살아 온 예수를 중심으로 합니다. 이러한 근거는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강조하고 있으며 예수의 전 생애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루카 1,35 ; 3,22 ; 4,1 ; 4,18 ; 10,21 ; 24,49)
17절에 “손에 키를 드시고 ...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매우 강력한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추수와 타작에 대한 비유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시편1,4 ; 잠언26장 ; 이사41,15 ; 예레15,7 ; 요한묵시록14,14-20)
성령과 불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요한은 농사 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듭니다. 농부들은 키를 가지고 곡식의 열매를 키질합니다. 그러면 무거운 것은 키 안쪽이며 키질하는 사람 쪽으로 오고, 가벼운 것은 키 밖에 쪽으로 놓여지면서 구별되어 키질하는 사람은 가벼운 쭉정이를 키 밖으로 떨어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무거운 알맹이는 따로 담아둡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신자와 불신자를 이렇게 구분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 각자에게 권고하는 것은 복음에서 본 것처럼 현재의 자리를 완전히 바꾸라는 것이 아닐 것 입니다. 우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양보하고 개선하며 주위를 바라보는 여유와 마음을 지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이 ‘기쁨의 주일’인 것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세례자 요한에게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세례자 요한이 전할 기쁜 소식을 놓치지 말고 내 삶의 전환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변해가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주심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분을 맞이 할 기쁨으로 설레는 날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미사 입당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