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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전례 말씀 묵상
주님 수난 성금요일 – 주님 수난 예식
1독서 이사야 52,13 - 53,12
2독서 히브리 4,14 -16 ; 5,7 – 9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요한 18,1 – 19, 42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본당에서 미사가 없는 지도 1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일년에 “단 하루” 미사가 없는 날인 오늘 성금요일에, 본당에서 미사 없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둠을 맛보는 날입니다. 100% 어둠이 어떤 것인지 체감하는 날입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 뜨는 새벽 ‘빛’의 밝아옴을 체험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밤에서 어둠으로 건너갈 때 세상의 변화, 자연의 변화를 그리고 우리 몸의 변화를 느껴보셨는지요? ‘이 어두운 날’이 지나면 우리는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은 1부 말씀 전례, 2부 십자가 경배, 3부 영성체로 이어집니다.
1독서는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로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2독서는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음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마르코에 의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들었습니다. 수난기의 구성 주제는 비슷합니다.
수난기 구성은 1)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 2) 신문을 받으시며 – 3)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 4)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 5) 숨을 거두신다 – 6) 군사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고 – 7) 무덤에 묻히십니다.
수난기 구성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어 돌아가십니다. 그분의 죄목은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예수”입니다. 이 죄목은, 십자가의 명패는 히브리말, 라틴말, 그리스말로 되어 있었고 많은 유다인들이 그 명패를 읽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것이 왜 사형에 처할 죄목이 될까요?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이미 BC 63년에 폼페이우스로부터 지배당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이두메아 출신 헤롯 안티파터(일명 헤로데왕)를 유대 집정관으로 세웁니다.
폼페이우스가 죽고(BC 48)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권 시, 헤롯 안티파터는 ‘유다인의 왕’으로 임명됩니다.
옥타비아누스(일명 아우구스티누스 BC 27 – AD 14)가 로마 황제 자리에 오르자 유다 지역은 로마가 직접 통치하게 됩니다. 헤로데 대왕(헤롯 안티파터)의 아들 아르켈라오스 영주는 반란으로 다스리던 유다 지역에서 쫓겨나고 로마가 직접 통치하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총독자리에 본시오 빌라도를 앉힙니다.
즉 예수님 시대에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티누스고 유다 지역 총독은 본시오 빌라도입니다. 예수님에게 붙여진 “유다인들의 왕, 임금” 이라는 호칭은 이미 헤롯 대왕이 죽음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명칭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고 ‘왕’이라는 명칭대신 그 아들 셋이 ‘영주’ 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그 세 아들 중 하나인 아르켈라오스가 유다 지역을 다스렸는데 푹동으로 물러서게 됩니다. 아들이 물러서자 그 지역을 로마가 직접 통치하게 되고 호칭도 ‘영주’에서 ‘로마총독’이라는 명칭으로 바뀝니다. 본시오 빌라도가 총독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렇듯이 팔레스티나는 로마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고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힘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자신들이 기다리던 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군중이 예수를 따릅니다. 유다인들은 많은 이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무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예수를 죽입니다.
잡히신 예수님예수님은 키드론 골짜기를 건너 제자들과 여러 번 갔던 정원으로 가십니다. 키드론 골짜기는 성문을 나오면 바로 연결되는 골짜기이고, 이 골짜기를 지나면 정원으로 이어집니다. 다른 공관 복음에서는 키드론 골짜기 대신 겟세마니 (마태 26,36 ; 마르 14,32)라고 명합니다. 유다도 이 정원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갑니다. 등불과 횃불 뿐 아니라 무기를 들고 들어 닥친 이 들을 보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으니 준비는 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서시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요. 이 대답은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메시아도 주님도, 랍비도 아닌 인간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하려고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기에(4. 9. 11)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 주셨는지 성 목요일 만찬 미사를 통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성 안에서, 아버지의 집에서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야만 합니다. ‘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일을 마쳐야 할 때가 왔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이 땅 위에서의 마지막 사명이 이룰 때가 다가왔습니다.
- 심문을 받으시다
현재 대사제는 카야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전 대사제인 한나스에게 신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만큼 비리와 부정이 계속되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한나스는 결박되어 온 예수님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 시대 대사제는 율법상 순결을 옹호하는 최고의 책임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결국 한나스는 예수님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카야파 대사제에게 보내고, 예수님은 다시 총독 빌라도 앞에 끌려갑니다.
예수님이 총독 빌라도에게 끌려 갔다는 것은 정치적인 죄목이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고 총독의 주요 임무는 질서 유지, 세금 징수, 형사 재판권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로마의 고통스런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바라고 있던 이런 희망은 사라지고 예수님은 잡힌 상태가 되고 말았으니, 유다인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정치적인 자신의 입장에서 심문을 합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냐?”는 것입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유다인들은 이미 왕정제가 없어졌고 당시에는 로마가 임명 한 총독이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 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했다고 3번(18,38 ; 19,4 ; 19,6)이나 반복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권한도 있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19,10)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19,12)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에 못 이겨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줍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죄명은 하느님을 모독한 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을 모독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십자가 위에 적인 죄명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예수”는 유다인들이 말한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인들이 바란 ‘자신들의 임금’이 아니기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속국에서 해방시켜 줄 힘 있는 ‘왕’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임금이요”라고 말하는 빌라도의 말에 부정하며 “우리들의 임금은 황제뿐”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
-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군중들에게 넘겨줍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까지 가는 대목이 단 한 줄로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간에 대신 진 키레네 사람 시몬을 언급합니다. 루카 복음은 보다 상세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23,26-31)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유명인이 최고의 형인 십자가 형을 받아 총독 관저에서 해골 터 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죄수와 그 죄수를 호송하는 군사들, 백성들의 무리, 그 무리들 중에는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분명 따라가고 계셨을 것입니다. 오늘 성 금요일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간직하셨던 마음을 공유하는 날입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연민과 고통과 아픔을 마음 속에 지닌 채 사랑하는 사람을 침묵으로 동반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은 험하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총독 빌라도가 사는 곳은 성 가까이 있는 도시 중심지에 있었고, 골고타 (해골 터)는 도성 밖에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 그 길은 가까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현재도 매주 금요일마다 바쳐지고 있는 이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 기도는 1시간 정도가 소요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야 할 장소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골고타(해골 터)입니다. 형도 십자가 형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 지려고(19,24)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십자가 위에 씌어진 명패가 그분은 죄 없음을 증명합니다. 십자가위에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건의합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쓸 것이 아니라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하고 저자가 말하였다고 쓰시오.” 즉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고 말 했지만 유다인 자신들의 임금으로써는 적당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곁에 어머니 마리아께서 계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도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 요한에게 사랑하는 모친을 모든 이의 어머니로 넘겨 줍니다 :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미 갈기 갈기 찢어진 어머니의 마음에 또 한 개의 가시가 박힙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가시로 변합니다. 시메온이 예언한 대로 어머니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에 (루카 2,35) 이 사랑의 가시는 희망의 싹이 되어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간청으로 우리들의 ‘평생 어머니’가 되십니다. 우리들의 ‘평생 동행자’가 되십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모친께서는 인류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 숨을 거두시다
“다 이루어졌다”. 모든 일이 다 이루어 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과 다름없었지만 그 죽음은 인류를 위한 아버지의 뜻이었음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본인이 것이 아니라는 말을 절감하게 되는 날입니다. 우리의 탄생도, 죽음도 모두 주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의 삶은 보다 더 평화롭고 행복하리라는 확신이 생깁니다.
- 군사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다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중요한 날입니다. 안식일이자 축일이 겹치는 파스카는 1년에 한 번 맞이하는 축일로 그들의 역사를 재인식시켜주는 중요한 날입니다.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금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19,31절에 “그 날은 준비일이었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축일이 되지 전에 끝마쳐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히브리인 전통 시장에는 안식일(주일) 준비를 위해, 안식일 전 날 오후 3시 전에 문을 다 닫습니다. 상인들은 물건을 더 팔려고 문을 닫지 않는 상점을 없게 하려고 서로 감시자가 되어 줍니다.
2021년도 히브리 파스카(Passover)는 3월 27일 토요일 해가 넘어가면서 시작됩니다. 7일간 파스카(탈출 12,15)를 지내기에 4월 3일 토요일 해가 넘어가기 전까지입니다. 이 파스카가 시작되기 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누룩(탈출 12,19)을 치우는 일입니다.
유다인들과 군사들은 이 파스카 축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웁니다. 군사들은 가서 시신을 확인합니다. 율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대로 지나쳐도 되는데 군사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19,36)
- 무덤에 묻히시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는 요셉의 청에 응합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쌉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가 향유로 발을 닦아 드렸을 때 말씀하셨습니다 : “내 장례를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12,7) 니코데모도 예수님(요한 3,1-21 참조)의 장례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목 박히신 곳이 있는 정원에 묻히십니다. 공관 복음서에는 이 무덤은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마태 27,60 ; 마르15,46 ; 루카23,53)고 합니다. 정원이라는 표현은 요한 복음에서만 사용합니다.
현재 이 ‘정원’안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예수님 무덤 성당 안에 있습니다. 매일 오후 4시 예수님 무덤 성당에서는 “행렬 기도”를 합니다. 14개의 제대(장소)를 돌며 기도를 하는 데 13번 째 기도 때에는 이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에 머물러 기도를 합니다. 기도 주례자는 제대에 분향하고 다음으로 경당 중앙에도 분향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인의 회개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태 26,13)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새로운 생명은 매일 미사 성제를 통해 기억되고 기념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에 감사 드립시다. 또한 아버지 성부의 뜻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순종과 겸손함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