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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사순 제1주일 전례 말씀 묵상
나해 사순 제1주일
1독서: 창세기 9,8-15
2독서: 1베드 3,18-22
복음: 마르1,12-15
오늘 미사를 안내해주는 입당송은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주님을 부르면 그분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를 해방시켜주시고 영예롭게 해 주시며 오래 오래 살도록 복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본인의 처지와 상황을 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주님를 부르며 부르짖던 에스테르의 기도(에스 4,17 이후)를 기억하시나요? 에스테르는 자신의 민족인 유다인들이 몰살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임금을 만나 백성을 구원해 달라는 청을 하려고 결심합니다. 그녀는 왕 앞에 나가기 전에 유다인들과 본인 그리고 그녀의 시녀들과 함께 사흘 동안 밤이고 낮이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값진 향료 대신 재와 오물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단식을 마치고 사흘 째 되는 날, 그는 임금을 만나러 갑니다. 죽음을 각오한 그녀의 기도와 행동은 몰살을 당하려던 유다인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도움을 바라는 이들을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제1독서는 인간들의 타락에 실망하고 분노하신 하느님께서 노아와 계약을 맺습니다. 노아 뿐만 아니라 노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 뒤에 오는 자손들과의 계약입니다.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그들과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계약을 맺습니다.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하느님과 배에 올라 탈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생물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성별된 이와 함께 하는 사람은 늘 보호를 받습니다. 하느님의 뜻 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많은 것을 홍수로 쓸어 버리시나 모든 것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습니다. 씨앗을 남겨 놓으십니다. 인간에게 다시 희망을 가지십니다. 나에게도 희망을 가지십니다.
제2독서
우리 인간들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정원을 잘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함께 있으라고 만들어준 짝에게 선한 것을 주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토록 죄 지은 인간들을 위한 중재자가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들을 하느님께로 다시 이끌어 줍니다. 죄 없으신 분이 고난을 겪음으로써 다시 생명을 받도록 해 주셨습니다.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그분이 당하신 고난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육으로 살해되셨지만 영으로 다시 생명을 받으신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세례를 통해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일부 본당에서는 파스카 성야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선발 예식’ 또는 ‘이름 등록 예식’을 거행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된 순간, 우리 각자의 세례를 다시 갱신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일상에 늘 작은 유혹들이 병행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써 가야 할 바른 길을 걷기 위한 은총의 시간이 되길 희망합니다.
복음
오늘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계십니다. 성령께서 그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곳 광야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탄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 자입니다.
첫번 째 유혹은 우리 목숨과 직결된 것입니다. 먹는 다는 것은 생명을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정 기간 단식을 할 수는 있지만 평생 단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정 기간 단식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뜻을 품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뜻이 강하고 위대할수록 단식의 기간을 연장 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얼마 동안 단식을 할 수 있을까요? 즉 내가 품은 뜻은 얼마나 강하고 가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기 8,3)
두 번째 시험은 “높은 데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마태 4,6). 이것은 명예, 자기 자랑과 영광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한 것처럼, 그분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신명기 6,16)라고 대답하십니다.
내가 가진 능력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느님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내가 내 자신을 잘 보이게 하려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나에게 절하라”는 것이었습니다(마태 4,9). 이것은 권력, 경배에 대한 타협의 유혹입니다. 사탄의 주장에 의하면 하느님은 하늘을 다스리고 자기는 이 세상과 땅을 다스리게 협정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루카 4,6 참조).
예수님께서는 경배의 대상이 확실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신명기 6,13)
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사탄이 아닌 다른 것들도 보고 만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물들입니다. 복음에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냈다고 언급되었습니다. 들짐승이 살아 있다는 것이 그들이 먹을 양식도 있다는 것이겠지요! 생물입니다. 이 생물을 보면서 우리는 광야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뭄 중에서도 그들은 목숨을 이어갑니다. 이토록 광야는 살아 숨 쉽니다.
가뭄이 끝났을 때, 광야가 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마른 땅에서 솟아오르는 푸르름의 새싹들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온 산등성이가 엷은 녹색으로 뒤 덮인 광야는 눈을 옮기지 못하도록 신비롭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성부께서 창조하신 가장 강한 생명의 뿌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지만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광야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광야의 강한 생명력을 품고 성령으로 충만하시어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말씀을 외치는 예수님께서 상상이 되시는지요?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간 예수가 아니라 요르단 강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축성된 분이, 인간들이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이 사순시기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도록, 은총을 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