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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5주일(요한 11,1-45)
사순 제5주일(2020년 3월 29일 )
요한 11,1-45
도입
요한 복음은 일곱 개 표징으로 되어 있다. 라자로의 소생은 일곱 번째 표징이자 마지막 표징이고, 표징의 책에서 영광의 책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다. 예수님은 9장 태생 소경의 치유를 통해 “나는 빛이다.”라고 계시하고, 11장 라자로의 소생을 통해 “나는 생명이다.”라고 자기 계시를 하신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9장 태생소경의 치유를 통해 인간에게 잃어 버린 영광의 빛, 거룩함의 빛을 주셨다. 이는 주님의 빛으로 인생의 끝이 어디인지를 바라보라는 초대이다. 우리 인생의 끝이 바로 우리 삶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모두가 죽음을 피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인생은 죽음을 향해 방향지어져 있고, 죽음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활이 무엇인지? 영원한 생명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질문해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질문에 답을 주신다.
11장의 주제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다. 이 기적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물리적인 죽음을 넘어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신다는 것이다. 그 영원한 생명은 믿는 우리들 안에 이미 시작되었다.
하느님 관점에서 보면 3개의 세상이 있다.
첫째 세상: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둘째 세상: 히브리인들이 셰올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모든 사람이 가야 하는 죽음의 세계이다.
셋째 세상: 죽음의 세계를 건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세상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계인 셰올의 문을 부수고 모든 이를 데리고 하느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말씀 묵상
기적이 일어난 장소: 베타니아에 있는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의 집이다.
베타니아: ‘고뇌의 집’, ‘가난한 자의 집’, ‘순명의 집’ 이라는 뜻이다.
라자로: “하느님이 도와 주신다.”란 뜻을 지닌 엘 아자르의 준말이다.
하느님의 도움에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베타니아의 가족: 이 가족은 종도 주인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단지 두 명의 자매와 형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도 공동체를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이 가족을 사랑하시고, 이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 유다인들의 입을 통해서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 증명된다(3, 5, 36절 참조). 가족은 사랑으로 맺어지고, 상호신뢰와 믿음으로 지탱되는 인간 기초 공동체이다. 바로 사랑과 믿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3절: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전갈을 보낸다. 살려 달라는 청원도 없고, 그냥 소식만 전한다. 어떻게 할 것인지는 예수님께 맡긴다. 마치 카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이 청한 방식처럼 단순하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이런 관계 속에서 사랑의 속성이 잘 드러난다. 사랑의 속성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주는 것이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준다. 그러므로 청원하지 않고, 온전히 모든 것을 내어 맡긴다.
4절: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모든 질병은 육체적인 죽음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라자로의 육체적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다. 사람은 죽음으로도 소멸되지 않는 운명을 지닌 존재이다. 죽음은 마지막 종착점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향해 건너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인간은 천사들처럼 순수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육체적인 생명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세상에 살다가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이렇게 물리적인 죽음을 향해 운명지어진 인간이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면 인간은 하느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시작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54) 이 생명은 인간의 물리적 육체 안에서 생겨나는 생명이 아니다. 그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생명,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육체의 죽음을 넘어 무엇을 예비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선물은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예수님께서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죽음을 통과하여 하느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경이로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진정한 죽음으로 이끄는 병은 창세기에서 말씀하시듯이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벗어나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6절: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이틀 더 머물렀다는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2가지다.
- 예수님은 인간적인 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시간 안에서 움직이고 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인간적인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고 절망이 극에 달했을 때 그분께서 행동하신다. 그래야 그분께서 하시는 일이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업적임을 분명히 보여 주실 수 있게 된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 예수님께서는 생물학적인 육체의 죽음을 없애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죽음이 없다면 인간의 노년기만 연장될 뿐이다. 죽음은 인간의 본성이고, 필연적인 운명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자연적인 운명을 바꾸기 위해 개입하지는 않으신다.
11절: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이며, 우리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가 주무신다는 것은 신앙의 망각을 뜻한다”고 했다.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고,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신다.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집 안에는 빛이 없고, 실망과 부질없는 위로의 말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신다.
21-22절: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등장 인물들과 예수님과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각자의 신앙의 정도에 따라 예수님과 관계 맺는 방식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마르타의 이 말 안에는 그의 분노, 고통, 좌절감이 포함되어 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단지 기적을 행하는 이로 믿고, 고백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고통 앞에서 쉽게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그러나 이는 죽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서로 다른 태도를 우리 내면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감성적인 면이 강한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에 벌떡 일어나 나갔다. 이는 감지할 수 있는 현존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 이미 자기 안에 있는 분을 구태여 밖에 나가 찾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분별력을 드러내는 것이며, 은총의 순간을 앞당기려 하지 않고 초자연적인 침착성을 지닌 기다림이다. 하지만 일단 부름을 받고는 지체 없이 나간다.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이다.
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인격에 주의를 집중하도록 ‘에고 에이미’ 정식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당신을 부활과 생명으로 계시하신다. 당신께 대한 믿음이야말로 부활과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역설한다.
부활: ‘일어나다’, ‘일으켜 세우다.’ 자동사, 타동사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여기서 누리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 방식이다. 주님께서 세례성사를 통해 당신의 생명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물리적인 육신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삶 (영원 속)으로 일으켜진다. 다시 말하면 이미 영원 속에서 살고 있고, 육체의 죽음을 건너 새로운 아버지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어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문장이 현재형으로 쓰여있다. 현재의 부활이고, 현재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이요”라는 말씀은 “나는 죽음에서 일어난다”라는 뜻이다. 당신을 통하여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변화시키는 힘이 흘러나와 빛이 발산되고 있음을 선언하고 계신다. 이 힘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가는 사랑과 진리의 힘이다. 이 진리의 힘이 실제로 라자로뿐만 아니라 마르타, 마리아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켜 세운다.
그러므로 이 빛은 이 세상에 있는 빛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빛도 아니다. 이 빛이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캄캄한 어둠 속에 남게 된다. ‘우리’라는 무덤 안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빛은 그리스도의 빛이다. 바로 이 빛이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이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이미 이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부터 부활과 생명을 사는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저녁에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의 건너감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 태중에 쌍둥이가 있다고 하자. 둘 다 태어날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연결된 탯줄 하나로 행복하다. 그들에게는 탯줄이 끈기는 것이 죽음이다. 쌍둥이 중에 하나가 먼저 세상에 태어나면 엄마 뱃속에 남은 다른 하나는 자기 형제가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죽음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한 다른 세상으로 들어 온 것이다. 어머니의 좁고 어두운 자궁에서 빛의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어머니 자궁은 더 성장하기에 접합한 곳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육신이 늙으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세상이 된다.
죽음은 하느님의 나라로 옮겨가기 위한 극적인 고통의 순간이지만, 더불어 축복의 순간이기도 하다. 죽음은 어머니와 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 보고 관상하게 해 준다.
33절: “예수님께서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고, 눈물을 흘리셨다.”
마리아도 울고, 유다인도 울고, 예수님도 우신다.
마리아와 유다인의 울음에 사용된 단어 ‘클라이오’는 장례식 때 하는 애곡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일반적인 슬픔을 뜻하는 단어 ‘다크리오’가 사용된다. 예수님의 감정을 요동치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교부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진짜 이유는 라자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인간은 모두가 죄로 인하여 가장 큰 징벌인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음과 악마의 잔인함을 보시고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신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온갖 허약함을 모아 놓은 것이요, 그 극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억압 앞에서 사람을 비겁하게 만든다. 인간의 이런 죽음의 비참함 앞에서 죽음의 세력과 맞서려는 예수님의 비장한 각오를 눈물로 드러내셨다고도 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다스리고, 지배하기 위해 오셨다. 실제 그 능력으로 라자로를 다시 일으키실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 내면의 악이 만들어 놓은 상처를 보시고 분노하시고, 눈물을 흘리신다.
34절: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예수님이 장소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의 신비적 의미가 담겨있다. 이 질문은 가족의 죽음을 체험한 우리 각자에게도 묻는 말씀이다. 사람의 마지막 운명이 죽음인 것처럼 죽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어디에서 끝났는지 묻는다.
또한 인간이 자신을 죽게 만드는 무덤이 어디인지 모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그가 결국 죄와 함께 죽음의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죄가 왜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인간이 어떻게 그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모르는 인간의 무지이기도 하다. 자신이 빛이 없는 무덤에 있다는 것은 죄와 함께 죽음의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그 죽음의 장소는 바로 그리스도라는 빛이 없는 장소이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묵상에서 그들은 열매를 먹은 후 하느님 앞을 피하여 숨었다. 그때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창3,9)고 물으신다. ‘무엇을 했느냐?”라 묻지 않으시고,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하느님을 떠난 장소가 죽음의 장소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는 장소가 바로 죽음의 장소다. 무덤이다. 생명과 관계없는 자리에 있음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39-40: “돌을 치워라,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돌은 동굴 안과 밖 사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표시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을 예수님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것이라는 뜻의 부정적인 말이다. 그러나 믿음만이 이 세상의 절대불가항력을 극복할 수 있다.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영광, 곧 그분의 실체가 이 세상의 어떤 장애에도 아랑곳없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믿음은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예수님의 기도
아버지 하느님께 깊이 결속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와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서 나온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아버지와의 일치와 아버지께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그러나 무덤 가에 모인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기도하신 목적이다. 그들에게 믿음을 얻어 주시기 위해서이다.
44절: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무덤 안에는 죽음이 있고, 무덤 밖에는 생명이 서 계신다. 라자로를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어두움 속에서 썩어가지 말고 일어나서 나와라’고 부르신 것이다.
성경에서 우정적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게 한다. 이 우정적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아가8,6) 죽지 않는 생명이다. 손발이 묶이고 보이지 않지만 사랑의 소리에 대한 신뢰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에 일어서 나온다.
사랑은 희망을 낳고 그 사랑에 도전하게 한다.
손과 발이 천으로 감긴 상태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내적 폐쇄, 각자의 사고방식을 상징한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수건은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이다. 주님께서 계시는 무덤 밖으로 자신을 불러 내어, 주님의 빛으로 묶인 것을 풀어 주고, 가면을 벗고 주님과 마주 바라보며 걸어가는 것이 부활의 삶이다.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어디로 가게 하라는 것인가?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항상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떠나 가게 해 주어야 한다.
성찰과 결심
나는 현재 부활의 신앙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마르타처럼 미래에 죽어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신앙을 살고 있는가?
부활 신앙이란 묶임과 가면 없이 열린 눈으로, 지금 여기서 현존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말씀과 성체성사로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시는 주님께 대한 신앙으로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는 은총을 청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