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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 대축일 전례 말씀 묵상
주님 부활 대축일
복음 요한 20,1-9
우리는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길고 긴 구세사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창세기 1장 첫 줄부터 시작하여 하느님의 마음과 뜻이 담긴 이 땅의 창조물들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생각하셨고 하루 하루 새로운 것을 만드셨고, 보셨고, 좋다고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새로운 것과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나가셨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이 생명을 낳고 번성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이렇게 인류에 생명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생명들은 성장하여 점점 퍼져나갔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들 가운에 ‘당신의 백성’
이 될 뿌리를 두셨습니다. 그 뿌리는 아무리 가물고 바람이 불어도 생명이 유지하길 바라셨습니다. 이 생명은 바로 당신을 닮은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려움을 접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개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이집트에서 끌어내셨습니다. 바빌론 유배지로 간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우상을 섬겨도 그들을 기다리셨습니다.
많은 판관들과 예언자들이 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했고 고백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나약함은 언제나 상황에 따라 변신합니다. 방황합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의 역사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여인을 택하시어 새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여인에게서 태어난 인간 아기에게 당신의 영과 권한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었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나약함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우리 인간들은 모두 절망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걸어간 삶과 너무도 똑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늘 얘기했지만 그의 죽은 다음에는 그가 살아있을 때 한 이야기는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잊어 버렸습니다.
오늘 요한 복음 속의 마리아 막달레도 이런 생각과 마음으로 무덤을 방문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주간 첫 날이란 안식일 다음 날이 됩니다. 그 전날이 안식일 이었으니 안식일이 해제 되자 말자 바로 움직였는지도 모릅니다.
막달레나는 무덤으로 향합니다. 무덤에 도착하니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각 복음마다 막달레나의 행동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납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상황을 전합니다. 그녀는 분명 누군가가 예수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고 생각합니다. 막달레나의 말을 전해들은 시몬 베드로와 제자 한 사람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달려가는 두 제자도 막달레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모릅니다.
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합니다. 무덤 안을 들여다 봅니다. 예수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예수님을 쌓았던 아마포만 보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무덤에 도착합니다. 그는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무덤 안에서 아마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쌌던 수건도 보았습니다. 그 수건은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뒤 따라 다른 한 제자도 용기를 얻었는지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간 제자도 수건을 봅니다. 그들은 보고 믿습니다!
막달레나도 시몬 베드로도 다른 한 제자도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있었지만 보고 믿었습니다. 기억이 되살아 났는지 모르지만 무엇인가를 보았고 믿게 됩니다.
오늘 입당송 시편에서 말합니다. “제 위에 당신 손을 얹어 주셨나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방문하시어 내 어깨 위에, 내 가슴 위에 당신 손을 얹어 주십니다. 느끼시는지요? 보이시는지요? 나에게로 오시는 주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지요?
부활하신 주님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리듬에 귀를 기울여 나의 리듬과, 주님의 리듬을 섞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비추어 주는 그 영원한 빛의 안내를 따라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