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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례 말씀 묵상
주님 수난 성지 주일
1독서: 이사 50,4-7
2독서: 필리 2,6-11
복음: 마르 14,1-15
오늘부터 성주간으로 들어갑니다. 거룩한 주간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그 거룩한 주간의 첫 날 입니다. 이 첫 날은 주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본당에서는 성지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 할 것입니다.
“성주간은 그리스도의 왕다운 위엄과 그분의 수난 선포를 결합시키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행렬은 기쁨이 넘치는 민중적인 특성을 띤다. 신자들은 성지 주일에 축복을 받은 종려나무나 올리브 나뭇가지, 또는 그 외 다른 푸른 나뭇가지들을 대개 가정이나 일터에 간직한다.” (대중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 139)
성지 주일 전례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 예식과 미사입니다.
첫째 부분에서 교회는 성지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둘 째 부분에서는 복음대신 낭독되는 ‘주님의 수난기’를 통하여 주님의 수난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수난, 죽음의 시기가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미사 전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 행렬을 합니다.
행렬 순서는 : 1. 사제의 권고 2. 성지 나무 가지 축성 3. 복음 낭독 4. 행렬을 합니다.
이 날 예루살렘에서는 오후 2:30부터 행렬을 시작합니다. 올리브산 아래에 있는 벳파게에서부터 시작 (마태 21,1)하여 예루살렘 구 도시 안에 있는 성 안나 성당까지 약 2.2Km의 거리를 행렬을 합니다. 행렬 시에는 각 종류의 성가를 다양한 언어, 그룹 별로 노래합니다. 이 때는 예루살렘 신자뿐만 아니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과(예루살렘에서 145km) 하이파(예루살렘에서 158 km)에서도 행렬에 참석합니다.
오늘 1독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박해 받는 종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예시해주고 있습니다.
1독서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4절-5절)에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 할 줄 알게 하십니다. ‘제자의 혀’란 표현은 구약에서 오로지 이 곳 한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자’ 라는 표현도 구약에서는 이사야서에 3번(8,16; 55,4 ; 54,13) 그리고 아모스서에 한번(7,14) 언급됩니다. 제자란 스승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즉 스승을 따르기 시작한 사람의 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사야에게 ‘제자의 혀’를 주신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귀를 일깨워 주십니다. 듣고 전해야 될 ‘하느님의 메시지’는 ‘제자의 혀’를 통해 전달 될 것입니다. 포로가 된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귀가 열리고 복음의 모든 요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메시지는 포로들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스승에게 배우는 제자의 자세(6절-7절)를 언급합니다. 매질 하는 자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잡아 뜯는 자에게 뺨을 내맡깁니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도와 주셔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2독서는 2단락으로 나뉘어 집니다.
전반부는 예수님의 겸손하신 모습을 언급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신 분이 자신을 비우어 종의 모습을 취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아들 예수를 행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끓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듣습니다. 복음 14장과 15장을 봉독하게 됩니다. 위에 지도서 “그리스도의 왕다운 위엄과 그분의 수난 선포를 결합시키는”라는 내용처럼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하여, 그분을 죽으려고 하는 음모, 잡히셔서 수난과 모욕을 당하시고 죽으시기까지의 예수님의 긴 생애 역사가 간략하게 요약되어 미사 중에 복음으로 선포됩니다.
사건이 발생한 날은 파스카와 무교절 이틀 전이었습니다.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축제 분위기에서도 예수님을 죽이려 음모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① 예수님 음모(14,1-2) : 복음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것은 파스카와 무교절 이틀 전이었습니다. 이 죽이려는 음모는 사실이 되어갑니다. 백성들의 대표들인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속임수’를 써서 예수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이 ‘속임수’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축제 기간에는 백성들이 두려워 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음모의 발단을 제시한 후 복음은 배경과 화제를 바꿉니다. 베타니아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로 건너갑니다.
② 죽음 예시(14,3-9) : 베타니아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자주 가던 마을입니다. 성전을 나와 동산 하나만 넘으면 됩니다. 무엇보다 이 마을에는 예수님을 반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편안히 쉬고 묵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일행이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있었습니다. 나병환자가 어떤 상황인지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집에 머물고 계신 것을 보면 나병이 이미 다 낳은 상태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아마도 식사를 하기 위해서 인가 봅니다. 유다 인들은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닦아야 했습니다. (루카 11,38 참조) 이 때 한 여인이 그 곳을 방문한 예수님에게 순 나르드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여인은 큰 용기를 낸 것입니다. 비싼 나르드 향유의 사용도 그렇지만 예수님 앞에 나타나기는 정말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은 이런 여인의 용기와 결단에는 관심이 없고 돈의 가치에만 관심이 갑니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 사건이 당신의 장례를 위하여 미리 한 행위라고 말씀합니다.
③ 유다의 배반(14,10-11) : 열두 명 중에 하나인 예수님의 제자 유다도 예수님의 죽음에 동조합니다.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 넘기려고 그들을 찾아갑니다. 유다는 계획적이었습니다. 수석 사제들도 이미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던 중이라 유다의 방문은 기뻤습니다. 그들은 유다에게 돈은 주기로 하고,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유다에게 돈이 필요했을까요?
요한복음에서는 사탄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배반하였다고 합니다. (13,27 이하) 그런가 하면 같은 복음 12,6에서는 유다에게 도둑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었으며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을 팔고 받은 돈으로 땅을 샀다고 합니다. (27,6-8) 이로써 예레미야 예언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27,9-10)
그러나 유다는 회개를 합니다. (마태 27,3-5) 다만 그 회개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 자신의 목숨을 잃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낳았을 것(마태 26,2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인간 유다의 자유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국엔 돌아가지만 사랑의 관계로 변화시킵니다.
예루살렘 성 밖에 위치한 베드로 닭 울음 성당(Saint Peter in Gallicantu) 전망대 에서는 유다와 관련 된 “피의 밭”이 내려다 보입니다. 힌놈 계곡이 끝나는 지점인 서남쪽에 있는 실로암 연못과도 인접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친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받은 은 돈 서른 닢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은 그 돈으로 옹기장이 밭을 사서 이방인들의 묘지로 사용하여 ‘피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마태 27,3-10). 현재 그 자리에는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④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준비와 성찬례 제정 (14,12-26) :
축제일(무교절)이 다가오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냐고 묻습니다. 복음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미래를 꿰뚫어 보시듯 파스카 음식을 마련하기 위한 장소와 사람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따라가 그 집 주인에게 스승님(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라 합니다. 제자들이 도성 안으로 가서 본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였습니다. 제자들은 미리 준비된 2층 방에 파스카 음식을 차립니다.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은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우리는 위 ③ 번에서 유다의 배반에 대해 보았습니다. 정말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이렇게 제자 유다를 통해서도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예수님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계속 해 나갑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만찬에서 하신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당신의 몸과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계약의 피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태오 복음에서는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를 통하여 우리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에페1,7 참조)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여 당신의 새로운 자녀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제자들과 파스카 만찬을 나누신 ‘큰 이층 방’(루카 복음 22,12)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세족례 장소로도 기억됩니다(요한복음 13,1~15).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한 뒤에도 이 이층 방에 자주 모였던 것 같습니다. 오순절에는 사도들이 이 이층 방에 모여 있을 때, 성령 강림이 있었습니다(사도 2,1~13). 제비를 뽑아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할 사도 마티아를 선택한 곳도 이층 방이었습니다(사도행전 1,13.15~26).
이 역사적인 2층 방은 아직도 예루살렘 성 바깥으로 남서쪽에 ‘최후의 만찬’방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에서 관리하던 성지였지만, 16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슐레이만 대제가 예루살렘 성을 다시 지으면서 성 밖으로 나가게 되었고, 회교도들에게 빼앗긴 뒤 이층 방은 사원으로 사용되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메카의 방향을 표시해 주는 미흐랍이 붙어 있습니다. 1948년에는 이 경당이 이스라엘 정부로 넘어갔으며 다윗 가묘를 중심으로 탈무드 학교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체 성사가 세워진 장소답게, 이 방 기둥 머리에는 펠리칸 새 문양이 남아 있습니다. 펠리칸은 기근이 들면 자신의 살과 피로 새끼를 먹인다고 하며,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상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⑤ 겟세마니에서 기도(14,32-42) : 예수님은 성찬례를 마치고 올리브 동산으로 가십니다. 늘 그러셨듯이 저녁 무렵에 예수님은 성전을 나와서 베타니아 동네로 가셨습니다. 이 동네를 가시기 전에 거쳐 가는 길이 올리브 동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에 이 동산에서 기도하시기로 합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을 “공포와 번민에 휩싸였던 때”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라고 말하고 함께 기도하자고 초대합니다. 그리곤 아버지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는 것을 하십시오.”
잠시 멈추어 서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 합니다. 얼마나 피하고 싶었겠습니까?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는 그분의 고백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을 느낍니다. 제자들 역시 육신의 나약함에 떨어져 있습니다. 세 뻔씩이나 예수님이 가셔서 보시지만 그 때마다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분의 시간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 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이 체포 직전에 기도했던 겟세마니 정원에는 “고뇌의 대성당(Basilica of the Agony)”이 세워져 있습니다. 16개국의 재정적 지원으로 건립되었기에 “모든 민족들의 성당(Church of All Nations)”이라고도 불립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대성당의 중앙 제대 앞에는 예수님이 엎드려 기도하셨다는 바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역사가 있는 장소이므로 이 자리에는 여러 번 성당이 세워졌었습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세워진 성당은 이미 예루살렘 공동체에 의해 경배된 자리에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성당은 여러 번 훼손되었졌고, 지진으로도 파괴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겟세마니 대성당은 다양한 역사 위에 1924년에 세워졌습니다.
⑥ 잡히시다 (14,43-50) :
예수님께서 잡히십니다. 무엇 때문에, 왜 잡히셔야 했을까요? 예수님 말씀처럼,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쳤을 때는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잡으러 왔습니다. 더구나 당신의 제자였던 유다가 앞장을 섰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다가와 입을 맞추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들과 이미 약속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⑦ 신문을 받으시다 (14,53-64) :
이 곳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62절)을 전 후로 해서 나뉘어 집니다.
- 예수님의 대답 전반부는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거짓 증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최고 의회들이 있는 것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는 대사제를 비롯하여 수석 사제들, 원로들, 율법 학자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증언합니다. 그러나 그 증언들은 서로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거짓 증언도 하였습니다.
- 결국엔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존재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당신이 메시아요?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하였습니다.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드님께서 전능하신 분의 오른 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죄명이 됩니다. 그 누군가의 증언이 아니라 예수님 본인이 당신의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말씀합니다.
-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사형을 받으셔야 마땅하다고 단죄하였습니다.
- 대사제가 말한 두 개의 질문을 묵상 주제로 남깁니다: 여러분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⑧ 베드로의 배반 (14,66-72) :
베드로의 배반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파스나 음식을 나누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14,27)라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 때 성격이 급한 베드로는 급히 나섭니다.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확실한 대답입니까? 그러나 우리도 그리고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혀 가는 대사제의 집까지 쫓아갑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앉아 예수님을 지켜봅니다. 베드로는 늘 예수님과 함께 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몰라볼 리가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하는 첫 번째 말은 “이이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어요.” 베드로를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으로 증언합니다. 맞습니다! 베드로는 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러 높은 산에 올라 갈 때 데리고 갔던 사람 중에 한 명이고(마르 9,2),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기도할 때 깨어 기도하라고 베드로에게 직접 말씀도 하셨습니다.(마르 14,37) 두 번째 증언은 ‘한패’ 였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언제나 함께 동고 동락 하였습니다. (요한 21,3 참고) 그러나 베드로는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세 번째 증언은 갈릴래아 출신임을 근거로 하여 증언합니다. “당신은 갈릴래아 사람이니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배드로는 또 부인합니다.
베드로의 그 강하던 장담도, 거부도 모두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⑨ 빌라도에게 신문과 사형 선고 받으시다 (15,1-15) :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르 15,14)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르 15,10) 루카 복음의 같은 내용을 봐도 빌라도가 3번씩이나 죄목을 찾지 못하였다고 반복(루카 13,4 ; 14-15 ; 22)합니다. 또한 갈릴래야 지역을 관할하는 헤로데도 예수님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였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루카 23,7-12)
그러나 빌라도는 자기 소신대로 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넘겨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빌라도는 자신이 로마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까 두려웠습니다. (요한 19,12 참조) 두 번째는 회중의 목소리가 두려웠습니다. 빌라도는 예루살렘이 아닌 카이사리아(Caesarea)에 머무르고 있었고, 유대인들의 큰 축일에만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판결 문제로 군중이 소요를 일으키면 이것이 로마 황제에게 전달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군중을 만족시키려고(마르 15,15)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습니다.
⑩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15,21-32) :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 무덤 성전 안에는 골고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자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성전을 들어가면 입구 바로 오른 쪽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예루살렘 시는 해발 700 미터이고 그 중에서도 예수님 무덤 성전이 있는 자리는 예루살렘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골고타는 성전의 제일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이 성전에 까지 걷는 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힘들고 고된 일이었습니다. 현재에도 예루살렘 길은 돌 길 인데다가 경사진 언덕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 전에는 더 했겠지요?
골고타 위에서 받은 예수님의 조롱과 놀림은 힘든 것이었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예수님의 겉옷으로 장난을 칩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예수님의 죄목을 가지고도 다투었습니다. (요한 19,21)
예수님께서 제일 듣기 힘드셨던 일은 ‘구원’이라는 말로 빈정된 사람들의 소리였습니다.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아버지의 뜻에 순명한 아들 예수님의 구원 사명을 가지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는 순간까지도 놀림거리로 장난을 쳤습니다.
⑪ 숨을 거두시다 (15,33-41) :
사람의 목숨은 자기 자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것을 제일 먼저 아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서 아버지께 자신의 목숨을 봉헌했습니다.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예수님의 죽음은 성경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음을 증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마르코 복음에도 나타나 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
-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은 인간 예수로써 인간들이 겪어야 할 아픔과 고통, 외로움과 나약함을 느끼셨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절규를 들을 때, 그분과 같이 소리치고 가슴을 움키게 됩니다. 하느님은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고, 그럴 의도가 없으시다는 것을 알고 믿지만 육신의 고통은 정신적 믿음을 흩트려 놓습니다.
우리 각자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생각의 자유를 갖습니다. 백인 대장처럼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 수 도 있고, 예수님을 비웃을 수도 있으며, 예수님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죽음, 우리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⑫ 묻히시다 (15,42-47) :
예수님을 무덤에 묻은 사람은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용기 있게 빌라도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 같았습니다. 그분께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두려움을 느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지만 아버지께 소리도 쳤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본인에게 하는 모든 말들, 거짓된 말들, 모욕적인 말들을 모두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이 땅 위에서는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내 준 빌라도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백인 대장에게 확인하고 나서야 시신을 내어줍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성경에서 제시해 주는 다음 차례의 전례 말씀 묵상 시간이 기다려 집니다. 주님 만찬 성 목요일 전례 말씀 묵상을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