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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사순 제 5주일 전례 말씀 묵상
나해 사순 제5 주일
1독서: 예레 31,31-34
2독서: 히브 5,7-9
복음: 요한 12,20-33
오늘부터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성당에 있는 십자가와 성화상들을 가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성금요일 오후 주님 수난 예식 거행을 마칠 때까지 가려 둘 수 있으며, 성화상들은 성토요일 파스카 성야 예식을 시작할 떄까지 가려 둡니다.
1독서에서는 옛 계약과 새로운 계약에 대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미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고통으로 신음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고자 결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계약(탈출 34,10-28)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계약을 어겼습니다. 단단히 정신을 차려 두 눈으로 본 것을 평생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고 당부(신명기 4,9 참조)하였지만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예레미야가 밝혔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두 가지 죄가 있는데 첫째는 생명의 물이 흐르는 원천(수맥)인 하느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 또 하나는, 그들은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들의 샘으로 삼은 것입니다. 우상 숭배를 하였던 것입니다. 판관기의 역사 하나만을 보더라도 하느님께서 얼마나 많은 지도자와 예언자를 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판관 2,16-17)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를 하였던 것입니다. 바알과 아스타롯과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였습니다. (판관 2,11-13)
그러나 하느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새 계약을 맺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가슴에 새겨둘 더 진한 새 법을 주십니다. 더 이상 중개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늘 전해주었듯이(탈출 19,3 ; 35,30)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줄 사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하느님께서 더 이상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허물을 용서하시는 것”(예레미야 31,34)을 말합니다.
제2독서는 인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 구원자가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분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독서에서는 그분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할 수 있는 분’께 ①큰 소리고 부르짖고 ②눈물을 흘리며 ③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인하여 ‘순종’하는 법을 배우셔야만 했습니다. 인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순종’이 어떠한 것인지 습득하셔야 했습니다.
그 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인간적인 모든 나약함과 고통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모두 보여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몸에서 나오는 울부짖음을 보여드립니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아버지의 마음에로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탄원이 아버지께는 청원으로 바뀝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들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보다 더 완전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아버지로 인하여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 데로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영원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옵니다. 이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입니다. 이것은 ‘때’로 시작됩니다.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 때를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23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아들’이란 누구일까요? 요한 복음서에서는 사람의 아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가 다시 올라가신 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요한 3,13-15; 6,53-54 참조), 죽은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세상을 심판하실 분(요한 5,27 참조), 마침내는 영광에 들어 높여지실 분(요한 13,31) 으로 표현됩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가 ‘다시 올려져야 한다’(요한 12,32; 6,62)고 표현됨으로써 그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24절에서도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이라고 직접적으로 그분의 죽음을 언급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아들은 ‘목숨을 잃을 것’(25절)이라고도 표현됩니다. 마지막으로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죽음을 당하신 당신을 따르라는 초대를 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음은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2)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한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4)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5)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끌어 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제자들도, 군중도 아직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자신의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두려움의 공포는 크기만 했습니다.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당신에게 사명을 부여하신 아버지 성부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죽음 앞에서 제일 먼저 기억한 것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첫째, 참된 삶, 참된 생명의 완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의 세계,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을 하느님과 재결합시켰기 때문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사람들에게 아들을 닮는 영광을 선물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셨지만, 그 죽은 예수님을 생명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선택된 이스라엘의 구원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으로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 위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의 순종적 사랑이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힘이 된 것입니다.
오늘 미사 때 선포된 요한 복음 앞 부분에서도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서라도 예수님이 완수 하신 구원의 사명은 이제 더욱더 멀리 전파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같은 요한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2,13)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라고 언급되었습니다. 이 유다인들의 축제에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고 언급되었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청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도 바오로가 증언한 것 처럼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콜로새 3,11)
예수님께서 인간의 나약함을 물리치고 고통과 죽음, 순명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 심어 주신 믿음에 감사 드리는 시간을 마련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부르시는 ‘때’가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는 바로 주님께 최고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시간이며, 나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그분께서 받아 주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