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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주일(마태 26,14-27,66:수난복음 중 일부분 발췌)
주님 수난 성지 주일(2020년 4월 5일)
마태오 복음 26,14-27,66 수난복음 중 일부분 발췌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26,20-25).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26,47).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26, 51-52).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것이오.”하고 대답하였다(27,24-25).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다음,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27, 50-54).
도입:
예수님의 수난기는 4복음에서 모두 전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복음서마다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다르고, 첨가해서 전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80-90에 쓰인 마태오 복음은 유다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것이다. 마태오는 이미 유다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왔는지 가르치고자 한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에서만 전하고 있는 내용을 중점으로 묵상해 보자.
말씀묵상
1.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최후 만찬을 시작하신다. 함께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친밀과 신뢰와 기쁨을 뜻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배반자가 있다.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말씀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묻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왜 스스로를 의심하는 질문을 할까?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똑 같은 질문을 한다. 자신만만하게 묻는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대답하신다. “네가 그렇게 말했다.” 이 말씀은 ‘너의 양심이 그것을 알 것이고, 그 누구보다도 너 자신이 그것을 알 것이다.’ 예수님께서 직답을 피하시고, 스스로에게 답을 찾도록 대답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유다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저녁식사는 조용히 끝난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 질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깊이 있게 점검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맺는 관계 안으로 깊이 들어라 봐야 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앉은 저녁식탁이다. 같은 대접에 손을 넣고 저녁을 먹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을 팔아넘길 제자가 있다. 유다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기적을 보았고, 사람들을 대하시는 주님의 태도를 목격했다. 그러나 유다는 처음부터 메시아와 그의 왕국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상적인 찬란한 왕국과 세상의 권력을 잡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스승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과 어떤 모범도 유다를 자신에게서 해방시키지 못했다. 유다의 영혼을 싸고 있는 껍질은 너무도 두꺼웠던 것이다. 그는 하느님을 찾지 않았다. 자신을 찾았고, 자신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사람들은 도덕적 손해보다는 경제적 손해에 더 민감하다.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심 생활보다 물질적인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돈을 위해서는 종교적인 가르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이상에 맞추어 적당하게 한계를 그어놓고 신앙생활을 한다. 특별히 성주간 앞두고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세례를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나에게 있어 신앙은 어떤 의미인가?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미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복음을 앞에 놓고 진지하게 이 질문을 하도록 마태오 복음 저자는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주님,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저는 아니겠지요?”
2.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 내용을 통해 강하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칼을 자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는 사실이다.
유다는 칼과 몽둥이를 든 무리들과 함께 스승을 찾아 온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신다. 무조건적으로 폭력을 거부한다. 의로운 사람을 보호하고, 정의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무기 사용을 금하신다. 예수님이 이룩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상은 폭력이 아닌 사랑 힘으로 건설된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 메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의 칼과 창 앞에 아무 저항 없이 목숨을 바쳤다.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행동으로 삶으로 증거한 것이다. 테르뚤리아노 교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손에 든 칼을 버리게 하심으로써 모든 군인들의 손에서도 칼을 버리게 하셨다.”
초세기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랐다. 폭력을 일삼는 이들에게는 세례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자의 유일한 힘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이 바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
3.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것이오.”
마태오는 이 문장을 통해 당대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신학적인 응답을 주고자 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70년 사이 이스라엘에는 심한 기근이 들고, 전염병과,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심했다. 결국 이런 재앙이 예루살렘 도시가 파괴되는 정점에까지 이른다. 마태오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질문을 하게 되고, 이런 시대적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신학적인 답을 주고자 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도시를 내려다 보시며, 하느님께로 돌아서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우셨다. 마찬가지로 마태오 또한 이런 재앙이 생긴 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마태오가 이 복음을 읽는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인류가 세상의 메시아인 영광과 권력과 부를 따르게 되면,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폭력과 속임수와 전쟁, 자연파괴를 면할 수 없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하느님을 외면하고, 문명의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생태계의 질서를 무너트린 그 결과는 우리 자손들이 짊어지게 된다는 경각심을 갖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잘못하면 용서하시지만, 자연은 용서가 없다.
4. 찢어진 성전의 휘장
1)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27,51절)
마태오가 우리에게 전고자 하는 메시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을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실현된 하느님의 최고의 계시, 구원의 역사를 바꾼 사건, 세상을 새롭게 탄생시킨 사건이다.
마태오는 AD 30년 4월 7일 오후 3시에 갈바리오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죽음과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상징적 표징을 대등하게 사용한다. 마태오는 거룩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찢었다.”라는 수동태 동사로 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이 성전의 휘장을 찢으셨다.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가리고 있었다.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의 날에 대제사장만이 번제의 피를 들고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장소라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그 시간에, 하느님께서는 이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것이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휘장을 찢으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휘장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가리고 있는 베일이다. 하느님께서 이 휘장을 찢으셨기 때문에 하늘은 열이었고, 사람은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예수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우리 각자의 내면에 드리워진 베일이다. 이 베일은 각자가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가진 하느님께 대한 ‘왜곡된 상像’이다. ‘왜곡된 상’은 정화를 필요로 하며, 정화시켜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드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 각자가 하느님과 함께 우리 마음에 드리워진 베일을 벗길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말씀을 통해 드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의 얼굴을 관조하고 직관할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이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과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2) “땅이 흔들렸다.”
땅이 흔들렸다는 말은 지진이 일어났다는 말인데, 이것 또한 상징적 표현이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나이 산으로 내려오시자, 하느님의 현존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땅이 흔들렸다”, “바람이 일었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시나이 산이 흔들렸다는 표현은 지진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모세의 마음과 정신에 지진이 일어 났다는 표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들어오실 때 우리는 그 경이로움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런 성서적인 표현을 바탕으로 “땅이 흔들렸다”는 표현은, 갈바리오 산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해 준다.
마태오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옛 세상이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체험할 때 조금씩 사고방식과 삶이 변화된다.
3) “바위들이 갈라졌다.”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 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게 되리라”(에제36,26-28).
“바위들이 갈라졌다.”는 표현 또한 에제키엘서의 말씀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이루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 내면을 가리고 있던 돌이 갈라졌다는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관상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닫혀진 마음의 돌을 치울 수 있게 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수난사화에서 바위들이 갈라졌다는 표현 이후에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① 로마 백부장과 그의 병사들: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라고 고백한다. 그들은 이 사건을 집행하면서 공정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인간의 힘과 인간적 사건을 초월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쳤고, 이 일이 하느님의 일이고, 죽은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임에 틀림없다는 고백을 한다. 이방인인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주님을 배척하는 민족이 되었다. 놀라운 변화다.
② 십자가 아래까지 동반한 여성들: 사회적 소외 계층의 여인들이 주님의 승리와 변화를 목격한 최초의 증인이 된다.
③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아무 두려움 없이 빌라도에게 가서 시신을 청하였고, 자기의 무덤을 내어 드리면서, 예수님의 장례를 장엄하게 치렀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무덤은, 자기 마음의 무덤을 예수님께 드린 것으로 묵상해 볼 수 있다.
④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승리감에 도취되었던 이들이 갑자기 불안과 무서움에 휩싸인다.
이렇게 모든 것이 바뀌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부활의 사건이 오기도 전에 모든 것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것이 곧 “당신의 때”가 도래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4)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 37, 11).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성서적인 언어를 통해 예언서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셔서 바로 하늘로 올라가시지 않고, 림보(Limbo)에 내려가셨다. 림보(Limbo)는 창세 이후의 모든 조상들이 구세주의 구원이 이루어 지기를 기다리던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당신의 그 능력으로 그곳으로 내려가 거기 있는 이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데려가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질적인 공간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로 데려가신 것이다.
5. 유다의 죽음 (27, 3-5)
마태오 복음에서만 유다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유다는 예수님의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친다. 그러나 그 순간 자기가 혼자라는 것을 느낀다. 사실 유다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자기 사고의 고립 속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도들을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유다는 자기 내면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 성전의 대사제들을 찾아갔다. 그들과 맺은 비극적인 거래를 취소하고,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지만, 그들은 유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만약 유다가 예수님을 찾아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다의 잘못된 선택은 자기 구원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데까지 이른 절망이었다. 이 절망은 유다를 죽음으로 이끌어 갔다. 죽음은 그 동안 살아온 삶의 모습을 증거한다. 어떤 모습이든 하루 아침에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6. 경비병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한다.
“이튿날 곧 준비일 다음 날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가서 말하였다.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그러니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내고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당신들에게 경비병들이 있지 않소. 가서 재주껏 지키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27, 62-66).
사람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을 때 나라의 지배자들은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헤로데는 새로난 유다의 왕을 없애기 위해 어린 아이들을 무참하게 학살한다(마태오 2,16-18참조). 이렇게 세상의 왕국은 폭력 위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에서 출발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내어 준 왕이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 지상의 왕국은 유순하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지 않는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더 강력하게 반항하고, 사납게 저항한다.
복음에 나타난 사제들과 빌라도처럼, 이 세상의 지배자들과 종교 지도자들도 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가 된다. 아무 저항 없이 죽어, 무덤에 묻힌 자를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갖가지 염려와 생각들은 그들의 불안한 마음의 표현이다. 이런 불안 때문에 무덤은 돌로 봉인되고, 그 앞에 경비병을 세운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장담하며 기뻐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생각은 그들의 착각일 뿐이다.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은 이 세상의 권력의 상징일 뿐이고, 무덤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 이것이야 말로 사랑의 힘이다.
성찰과 결심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 위에 세워진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표현은 어떤 것인가? 폭력적인 언어, 불만, 불평, 판단, 비난, 좌절, 절망인가? 아니면 사랑, 기쁨, 평화, 진실, 온유, 절제, 인내, 친절, 선행, 감사의 표현인가? 성찰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