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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대림 1주(마태오 24,37-44 )
대림 제1주일(2019. 12. 01)
(마태오 24,37-4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도입: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참 인간성을 성취한 사람, 참사람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참사람이 되어 역사 안으로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을 참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시기 위해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존재를 받아들였다. 이는 당신의 왕국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인간성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은 우리 전 존재를 당신께로 끌어당겨 하느님의 말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셔서,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따르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신다(2코린 5,18-20).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구약의 노아 시대에 비유한다. 노아 때 사람들은 향락에 빠져 살았고, 먹고 마시고 모여 노는 일이 극성을 부리던 때였다.
말씀 묵상
38절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노아 시대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첫째 그룹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특별한 희망이 없다. 눈에 보이는 먹고 마시는 일 외에 다른 운명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노아가 오랜 세월 방주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고, 방주를 만드는 이유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노아의 말을 믿지도 않았고, 세상에 변화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리지도 못했다. 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고,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사라질 운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둘째 그룹은 노아의 가족이다. 그들에게는 먹고 마시는 일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그 날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늘날도 노아 시대와 똑 같다. 모두가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오로지 물리적인 생명에만 매달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노는 일에만 몰두해 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힘이 있는지,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든 선택의 기준이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지가 전부인 사람도 있다. 오로지 존재하는 현실이 우상이 되어 좋아하는 것을 좇아 시간과 돈을 써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이들과 반대로 노아의 가족처럼 깨어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숫자는 매우 적다. 이들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끝나간다는 것을 알아 차린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없이 살지는 않는다. 다가올 세상에 대한 희망 안에서 심사숙고하면서 살아간다. 이들은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진정한 자기 성취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는 사람들은 노아처럼 믿음 안에서 방주를 만드는 일에 전념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의 삶과 자기 직업에 빠질 위험이 많다는 것을 다음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40절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자기 직업에 종사하는 두 가지 마음 자세를 말한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부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있었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서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요한의 대답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먹을 것을 가진 이는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세리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고, 군인들은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루카 3, 10-14참조).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맡은 직업에 충실하되, 보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세상이 되도록 가정과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이익을 위해, 세상의 재물을 축척하는 일에만 몰두하지 않게 된다. 진정으로 복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 삶을 인도해 가도록 내맡기게 된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서 이 사회와 동시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각자의 삶 안에 이런 변화의 사건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대림이다. 대림절은 주님이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시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인도해가도록 맡겨드리는 시기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할 때 우리 삶은 변화되고, 세상은 변화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되고, 참사람,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참 인간성을 실현해 갈 수 있다.
41절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맷돌질을 하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선행의 기회로 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무리를 상징하고, 다른 한 사람은 헛되이 맷돌만 돌리는 무리를 나타낸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 직업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자기 직업에 충실하면서, 동시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된 직업정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42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인생은 화살처럼 빨리 지나간다. 이 짧은 인생에서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묵상해 봐야 한다.
44절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 보다 도둑이 자신의 돈을 훔쳐 갈까 봐 더욱 염려한다. 집주인은 인간의 영혼을, 도둑은 악마를, 집은 육신을, 문들은 입과 귀를, 창문은 눈을 뜻한다. 도둑이 훔치기 위해 문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처럼 악마도 사람의 입과 귀와 눈을 통해 쉽게 그의 영혼으로 들어가 그를 포로로 잡는다. 악마의 활동은 은밀하게 시작되기 때문에 영혼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악마가 드나들 수 있는 입구를 모두 닫아야 한다고 옛 성인들은 가르친다. 입은 부지런히 거룩한 말을 올리고, 귀는 경건한 소리를 담고, 눈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보고, 마음은 거룩한 생각들을 해야한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무엇보다 복음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 오늘의 세상은 매우 소란스럽고, 혼란스럽다. 수 많은 가르침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가치 있고, 올바른 가르침인지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유행과 광고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모두 그렇게 해, 모두 다 좋아해’라는 세속적인 윤리 기준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소리에 응답하지 않는 침묵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깨달을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 인생은 화살촉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세속에 정신을 빼앗기면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한 순간에 잃게 된다. 신랑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면서 오시고,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매우 시급한 문제다. 왜냐하면 이 선택에 따라 우리는 영원한 삶으로 옮겨 갈 수도 있고, 소멸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찰과 결심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아는 죄인들은 더욱더 그릇된 쾌락을 추구하고, 먹고, 마시고 모여 노는 일에 극성을 부릴 것이라고 한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