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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2019년 10월 13일 연중 제27주일(루카 17,11-19)
2019년 10월 13일 연중 제27주일
루카 17,11-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 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 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 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 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도입:
나병은 ‘sarat’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공격하다. 자극하다. 쏘다. 치다, 라는 뜻으로 나병환자는 그가 범한 죄가 원인이 되어 하느님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루카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말씀묵상:
12절: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나병환자로 마을 가까이 왔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상조차 못하는 일이다. 레위기 13, 45-46에 따르면 이들은 사회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다. 나환자들끼리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전염을 막기 위해 또는 성한 사람이 나환자를 만지면 불결해 진다고 규정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면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러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마을로 왔다.
마을: 마을은 하나의 전통을 상징한다. 마을은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추론하면서, 살아가는 곳이다. 마을은 낡은 세상을 상징한다. 우리가 빠져 나와야 하는 세상, 다시 되돌아 가서는 안 되는 세상이다.
열 명의 나병환자: 10은 전체를 상징하는 숫자다. 루카가 전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모두가 나병환자와 같이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 이 마을에 들어오셨을 때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리고 싶은 것이다. 나병환자 열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상징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중에 몇 명이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적어도 이 열명은 자신들이 나병환자라는 것을 의식하고 인정한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처지를 체념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자신들의 가난함을 드러내 보인다.
13절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에게 치유를 청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들의 상태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청한다. 나병환자들은 하느님에게 기도마저도 할 수 없었다. 당대의 랍비들이 그들을 향해 ‘당신들은 나병환자요. 하느님께 저주 받은 사람이고, 벌을 받았으니, 기도를 해도 하느님께서 듣지 않으실 것이요.’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시편(6,2; 9,14; 41,5.11; 123,3)에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죄인이고,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야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의 표현으로 드리는 애원 기도이다. 이것이 교회 전례로 들어오면서 “자비송”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미사 시작 때 바치는 기도가 되었다.
14절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당시 사제들은 율법을 해석하는 직무를 맡고 있었다. 부정을 선언하는 것도, 깨끗하게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도 모두 사제들의 직무였다. 그 직무를 존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특별한 행위가 아닌 이미 질서 잡아 놓은 모든 것에 순명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기존의 율법에 대한 존중과 순명이 있을 뿐이다.
둘째: 치유는 단순하게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치유의 은총을 얻는 유일한 길이었다. 루카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교훈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명이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치유되었다.
그들이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 졌다는 것은 여정을 상징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해야 할 일은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여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정신적인 나병은 치유될 것이다. 치유는 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열 명의 나병환자처럼 긴 여정이 필요하다.
15-16절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단 한 사람만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되돌아 왔다.
하느님께 찬양을 드린 사람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던 사람이다. 바로 그 사람이 하느님께 찬양을 드린 것이다. 하느님께 찬양을 드렸다는 뜻은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을 알아 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나병이 치유된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는 반드시 특별한 기적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을 알아 볼 눈이 없다.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감성이 필요하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사람이나, 죄인이나 그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으시고, 돌보신다. 마치 나병 환자를 치유하신 것처럼 그들을 받아 들이시고, 쓰다듬으시고, 치유하신다. 바로 이 모습이 참 하느님의 얼굴이다. 사람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을 아름답게 보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알아보기 위해서는 영적 감성이 준비되어야 한다. 이런 영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은 유다인이 아니라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는 죄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조건 없이 빛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 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를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시는지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은 쾌락주의에 빠져 불행의 길을 걷고 있는 이 사회를 치유하고 돌보고 있다. 오직 복음의 정신만이 생명의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영적 감각으로 이 사실을 알아 차리고 있는가?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찬양드릴 수가 없다.
19절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치유했다고 하지 않으시고, 너의 믿음이 너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모든 잘못과 결점,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를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온다. 믿음은 지금 주님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씀을 받아 들이고, 의탁하는 것이다. 오직 복음이 나에게 이야기 해 주는 말씀에 믿음을 둘 때 구원은 이루어진다.
성찰과 결심:
말씀으로 우리를 동반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 보고 깨닫는 영적인 감각이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매일의 말씀이 우리를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시도록 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