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 담긴 씨앗
안현주 M.레지나 수녀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필립 2, 13 – 공동번역)
저는 올해 수도서원을 발한 안현주 마리아 레지나 수녀입니다. 2년간의 수련기를 거쳐 서원하기까지 기도로 함께해 주신 스승 예수 벗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첫 서원을 준비하며 대피정을 하던 중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주님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묵상은 잘되지 않고 여러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가득히 부유하고 있었습니다. 기억의 분심(分心)들을 내려놓으려 힘을 쓰다 졸고 있었는데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어릴 적, 늦은 저녁이 되면 아버지는 포근한 이불 속에서 저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셨습니다. 밥 먹기도 마다하고 친구들과 실컷 동네를 누비며 뛰어놀던 제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아빠가 읽어주는 동화책 속 주인공이 되는 그 시간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아빠의 퇴근만을 기다리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기억의 분심(分心)들을 쫓으며 나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왜 그리 어렵고 힘든지, 온갖 핑계를 대며 들여다보기를 마다합니다. 동화책 속의 주인공처럼 꿋꿋하지도, 아름답지도, 정의롭지도 않고, 실패에 금방 낙담하고 마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이 두려워 나를 보지 못하고 이내 덮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릴 때 아빠가 동화책을 읽어주시며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셨듯이 설명해 달라고 징징대며 하소연합니다. 그런 나를 꾸짖거나 홀로 두지 않으시고 ‘그랬구나. 내 딸 많이 힘들었니?’ 하시며 등을 토닥여 주시는
그분은,
내가 기뻐할 때 누구보다도 더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아프고 힘들어할 때 나보다 더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늘 옆에서 사랑을 표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늘 혼자인 줄 알았는데 항상 곁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곁에 계시는 당신을 외면하던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늘 필요할 때만 찾는 이기적인 나를 기꺼이 기다리신 분이십니다.
뭔가 체한 것처럼 뭉쳐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집니다. ‘나와 함께 볼까?’ 하시며 내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시기도 하시고 차근차근 설명해주시기도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나의 책을 다시 열어보니 너무 많이 덮어두어 보지 못하고 머릿속을 가득히 부유하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 속에 아버지 하느님을 닮은 나의 모습이 하나하나 펼쳐집니다. 이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어릴 적 아빠의 퇴근을 기다리듯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은 나를 어떻게 보여주실지 예수님과 만나는 그 시간을 기다립니다. 주님께서는 분심이라 생각하며 떨쳐버리려는 기억들 속에서 작은 씨앗 하나를 발견하게 해주셨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제 막 싹이 트고 자라는 제가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스승 예수 벗님들께 앞으로도 계속 기도의 동반을 청하며 하느님의 손에 저를 맡겨드립니다.
성령님께
진리의 성령님,
당신께 저의 지성과 상상과 기억을 드리오니, 저를 비추소서.
제가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을 알아듣게 하소서.
제 안에 지혜와 지식, 통찰과 의견의 은혜를 더해주소서.
성화시키는 성령님,
제 의지를 바치오니 당신 뜻대로 저를 이끄시어
계명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도록 저의 힘이 되어주소서.
(바오로 가족 기도서 2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