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리·생명이신 스승 예수님
제가 가는 곳마다 은총과 위로를 가져가게 하소서.
(스승예수님께 바치는 기도 중에서)
제가 가는 곳마다 은총과 위로를 가져가게 하소서.
(스승예수님께 바치는 기도 중에서)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편 46,11)
김데레사 M.대건안드레아 수녀
“벗 회원님들, 안녕하시지요. 매월 첫 주간 월·화요일에 스승 예수님 성당과 알베리오네 홀, 마당, 중정에서 들리던 벗 회원님들의 소리가 그립습니다. 직접 뵙는 것만큼은 못하지만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소통할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께 찬미를!”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이 말씀을 ‘음미(吟味)’라는 단어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대는 ‘음식 문화’가 대세인 것 같습니다. T.V에 ‘맛있는 요리’ 프로가 많이 생기고, 가게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납니다. 맛을 잘 알기 위해서 “음미”를 합니다. 음미(吟味)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내용이나 속뜻을 깊이 새기고 감상하거나, 음식의 그 맛과 향을 즐기며 맛본다’입니다. 즉 음식이나 사물, 시를 진지한 태도로 여유 있게 바라보고 느끼며, 내 것으로 소화하는 것입니다. 먼저 음식, 포도주, 커피를 즐기기 위해 브랜드, 품종, 생산지, 만든 날짜 등 정보를 확인합니다. 교회에서 출판된 말씀에 대한 성경해석, 주석서들이 바로 정보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골국 맛은 적당하게 천천히 고아야 진국이지 짧은 시간 후루룩 끓인 사골국은 맹물 맛이 납니다. 트로트 노래 중에 ‘전화기 충전은 잘하면서 내 삶은 충전하지 못하고 사네. 마음에 여백이 없어서 인생을 쫓기듯 그렸네. 마지막 남은 나의 인생은 아름답게 피우리라.’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피우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멈추어 그 말씀을 천천히 음미하는 여유로운 여백의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음식과 차를 무의미하게 먹고 마시는 것보다는 음미하며 맛을 느껴야 즐거운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도 그 맛을 느껴야 즐겁습니다. 말씀의 맛을 느끼면 하느님을 알게 되고, 일상을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기쁩니다. 기도할 때 ‘온갖 생각’들이 극성이지요. 그 생각들을 억지로 치우려 하지 말고 분심을 느낄 때 마음에 와닿았던 말씀 구절로 부드럽게 되돌아갑니다. ‘내 혀에서 음식 맛을 느끼기 위해 나의 오감을 비우고 천천히 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말씀을 음미하기 위해 ‘나의 좋은 생각, 계획’들을 내려놓고 말씀이 나를 움직이시도록 ‘그냥’ 기다립니다. 루카 19장 “예수님과 자캐오”에 대한 말씀으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캐오는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으로 용기를 내어 나무에 올라간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됩니다. 말씀을 읽은(반복) 후 마음에 와닿는 말씀에 머뭅니다. - 자캐오의 행동, 나무에 오르는 장면, ‘키가 작은 자캐오는 예수님이 지나갈 길을 앞질러 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 예수님과 만나는 장면, 자캐오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예수님. 예수님(말씀)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 자캐오의 실천적인 응답 ,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마음에 와닿은 부분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머물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갈 때까지 음미하듯 고요히 멈추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자케오가 있던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을 느낄 수도 있고, 예수님이 나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예수님께 여쭙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느껴오는 것이 다양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게서 오는 것들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느낌이며, 분위기가 맑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이지 않으며 단순합니다. 기도할 때 정좌 자세로 할 수도 있지만, 걸을 때, 지하철을 이용할 때, 설거지, 청소 등 내가 숨을 쉬는 모든 순간에 말씀과 함께하며 내 생각을 “멈추면” 가능합니다. 이러저러한 생각 가운데 잠시 내 생각을 내려놓은 순간이 있었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고요함의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고요함의 맛, 체험을 마음에 간직할 때 삶이 조금씩 풍요로워집니다. 이는 단방에 되는 것이 아니기에, 매일 꾸준히 할 때 조금씩 말씀에 맛을 들여가고 진보합니다. 창립자 복자 알베리오네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기도문으로 말씀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천상 스승 예수님, ~저희는 당신이 지상에서 하신 갖가지 일을 관상하고, 당신의 배움터에서 가르쳐 주신 것을 온순하게 따르겠습니다. ~오로지 당신의 뜻만을 찾게 하소서.”(바오로 협력자 기도서 140쪽). 여기서 관상(觀想)은 신비의 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행적들을 바라보며 나와 맺으시는 관계, 나에게 건네시는 말씀들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벗 회원님들은 일상에서 ‘멈추고 하느님을 알아가기’를 누구보다 원하시기에 그동안 매달 스승 예수님의 벗 회원으로서 수녀원에 오셔서 렉시오 디비나와 성체조배로 스승 예수님을 만나셨고, 지금도 그날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부활을 향해 가고 있는 벗 회원님들의 여정이 말씀을 간직하신 어머니 마리아와 성 요셉처럼 스승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갖가지 일을 관상하며,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일상이 되게 하소서.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