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리·생명이신 스승 예수님
제가 가는 곳마다 은총과 위로를 가져가게 하소서.
(스승예수님께 바치는 기도 중에서)
제가 가는 곳마다 은총과 위로를 가져가게 하소서.
(스승예수님께 바치는 기도 중에서)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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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아야 아야야….”
“이모, 아파? 내가 호-해줄게. 그럼 나을 거야.”
“그래. 호- 해줘.”
“호~ 호~ 이모 이제 안 아프지?”
“음…. 그래도 쫌 아픈데 어쩌지? 이모 아프지 말라고 예수님한테 기도해줄래? 그럼 이모 하나도 안 아플 것 같아.”
“알겠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카 녀석은 조그만 두 손을 힘주어 꽉 마주 잡고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잠시 기도 속에 잠겼다.
“이모! 나 기도 다 했어. 이제 안 아파?”
“그래? 어디 보자. 우와…. 이모 다 나았나 봐. 예수님이 기도를 들어주셨나 봐!”
“진짜? 진짜? 이모 이제 하나도 안 아파? 그럼 나랑 빨리 놀아줘.”
내가 정말 괜찮은지 확인한 조카는 이내 소기의 목적인 같이 놀아주기를 제안한다. ‘하, 고 녀석 참….’ 조금 부딪혔을 뿐인데 걱정하는 녀석을 보니 그만 아파해야 할 것 같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와 같아져야 한다는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아이들을 통해 조금씩 더 깨달아 간다. 기도해달란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기도해주는 아이. 반강제적인 요구이긴 하나 꼭 들어 주리라는 커다란 신뢰심을 가지고 청하는 아이. 맑은 눈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는데, 그 반짝이는 눈빛 앞에서 “안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아마도 아이를 울리겠다고 작정한 사람뿐이리라.
예수님께서도 당신께 믿음을 가지고 청하는 기도에 늘 응답을 해주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라고 여러 번 말 씀하시지 않으셨던가? 하느님께 기도하는 데는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순수하고 욕심 없는 기도일수록 하느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러한 기도야말로 하느님 뜻에 가까운 기도일 테니 말이다. 그것이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라면 더없이 기껍게 받으시리라.
11월 위령 성월에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이 세상을 떠난 이들, 우리의 부모, 형제, 친 지, 지인, 벗 회원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기도 하며 희생과 선행을 바친다. 이 아름다운 전통은 998년 클뤼니 수도원의 5대 원장이었던 오딜로(Odilo)가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지내도록 수도자들에게 명한 것에서 유래 되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널리 퍼지면서 오늘날처럼 11월 한 달을 위령 성월로 지내게 된 것이다.
바오로가족 기도서 157쪽에는 “위대한 사랑의 기도”가 있다. “나의 하느님, 당신의 더 크신 영광을 위하여 제가 앞으로 행할 모든 선행 중에, 속죄의 가치가 있는 것과 죽은 후에 받을 기도를 예수님과 마리아의 공로에 합쳐 당신께 드리며, 연옥 영혼들에게 양보하오니 당신의 거룩하신 뜻대로 모두 사용하소서.” 처음 이 기도문을 접한 나는 연옥 영혼들 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리고 나면 나 자신은 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워 한동안 이 기도문을 멀리했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연옥 영혼들을 위해 이 기도문을 바치며 열심히 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기도문을 바치기 시작한 나는 무슨 엄청난 것을 바치는 사람인 양 예수님께 내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며 온갖 생색을 다 부렸다. 하루는 공로가 될 만한 것들이 얼마나 있는가 차근차근 따져보는데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내가 ‘공로다, 선행이다, 희생이다.’ 하면서 행한 모든 일이 그분 눈앞에 내어놓고 보니 참으로 하찮고 부족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고귀한 황금이나 되는 양 들이밀면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분은 이 하찮고 부족한 모든 것을 기쁘게, 소중하게 받아 주셨다. 오히려 나는 주님의 자비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오직 주님의 사랑만이 필요한 존재임을, 그 따스한 손길 안에서 여실히 드러내 보여 주셨다.
주님 앞에서 우리가 쌓은 공로가 크건 작건, 가치가 있건 없건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 안에 머무르는 것만이 더 소중함을 알아간다. 이는 한없이 쏟아지는 주님 은총의 빗속에서 ‘나는 자격이 없어요’라며 우산을 쓰고 들어앉아 있지 않은 것이다. 나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나는 남을 사랑하는 일에도 서툴렀다. 그래서 늘 내 것을 남이 가져간다고 느끼며 화를 내고 시샘을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주님께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깨달은 순간부터 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분의 사랑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다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께 신뢰를 두며 그분 안에 머물렀다. 그냥 믿었다. 그분께서 나를 전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분께서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기도하는 이는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며”(필리 2, 4),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위해서까지 기도한다(마태 5, 44 참조). 그리스도인의 전구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1티모 2, 1), 박해하는 사람(로마 12, 14 참조), 그리고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구원 을 위하는 데까지(로마 10, 1 참조) 한계가 없 다(가톨릭 교리서 2635~6항 참조).
11월 한 달간은 내가 쌓은 공로나 받을 기도를 계산하고 따지지 말고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 모두가 사랑 가득한 주님이 계신 하늘나라에서 영복을 누리기를 기도하며, 언젠가 다가올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라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