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리·생명이신 스승 예수님
제가 가는 곳마다 은총과 위로를 가져가게 하소서.
(스승예수님께 바치는 기도 중에서)
제가 가는 곳마다 은총과 위로를 가져가게 하소서.
(스승예수님께 바치는 기도 중에서)
코로나19 시대의 순교
강혜자 M. 파체 수녀
「차쿠의 아침」이라는 소설책을 읽고 최양업 부제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최양업 부제는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소식을 들었을 때 지금은 조선 입국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순교한 분들을 기록으로 정리하여 교황청에 보고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홍콩(당시 파리 외방 선교회 극동 지부가 있었음)으로 가서 순교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한 어느 날, 메스트르 신부님이 최양업 부제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나저나 요새 답답하지? 젊은 사람이 맨날 책상 앞에서만.” “글쎄요,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엔 장렬하게 순교하는 것이랑 일상의 어려움들을 견디는 것이랑, 같은 일이 아닐까 해요.” 갑자기 메스트르 신부님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래, 그게 바로 자네의 장점이지. ...중략... 자네 같은 영성도 꼭 필요하다는 말이야. 언제까지나 박해시대만 있는 것 아니지, 이 다음 ... 신앙의 자유가 오면 그때 나타날 적수는 더 까다로운 상대일지도 몰라. ...중략... 우리 프랑스 좀 봐! 박해 시대의 적수는 보이기라도 하지, 자유로운 시대는 보이지도 않아. 맨날 보고 듣는 ‘생활문화’에 스며 있어서 얼마나 반복음적 문화가 판을 치는지 몰라 ...중략... 박해 때는 ‘저기 먹구름이 끼었구나,’ 파악이라도 했지, 세속화돼 버리면 분간도 잘 안 돼! ...중략... 박해 시대의 영웅은 순교자이겠지만, 신앙의 자유가 오면 가장 평범한 사람이 진정 영웅일 거야. ...중략... 박해 시대의 십자가는 칼날이겠지만… 자유로운 시대의 십자가는 어쩌면 자기 자신 하나 잘 견뎌내는 일일지도 몰라. 거창한 희생이 아닐지도 몰라, 어차피 생로병사로 소멸되어 가는 스스로를 잘 받아들이는 일, 보잘것없는 일상의 편린들을 감내하는 일인지도 몰라. ...중략... 인간관계 안에서의 자기 낮춤, 사소한 양보, 먼저 건네는 인사, 화해, 섭섭해도 넘어가 주기, 또 재미없어도 함께해 주기, 맨날 계속되는 빨래와 설거지, 잔병치레와 권태 같은 일상의 너저분한 것들을 기쁘게 살아내는 것 ...중략... 이런 것도 일상의 작은 순교라고 보는 거지.”(pp 364~369) 그렇다.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거룩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오늘날 순교의 영성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본다. 코로나19로 인해 답답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매일, ‘확진자가 몇 명 나왔어? 해외 유입에서 발생했다고 하던데? 방역 수칙 준수해 달라(...). 먹을 때는 말 없이, 마스크 쓰고 이야기하자. 등등’ 미사도 영상으로, 기도도 영상으로 하는 코로나 시대.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불평이나 짜증 대신 희생으로 기쁘게 봉헌할 수만 있다면 코로나19 시대의 순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찜통더위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 수밖에 없는 이 시기에 이것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시원한 소재로 옷을 입고 에어컨을 2도 높이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순교라는 것을 우리는 알까? ‘대화할 때 마스크 쓰고, 공공장소, 밀폐된 장소에 가지 않는 것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실천하는 것이 일상의 순교라는 것을 우리는 알까? 자연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비닐 덜 쓰고, 플라스틱 덜 사용하기 위해 일회용품 사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 일상의 순교라는 것을 우리는 알까? 코로나 19로 인해 더욱 어려워진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이 순교라는 것을 우리는 알까? 나는 대구의 가장 번화가인 동성로에 살면서 매일 본다. 새벽에 내가 사는 이 거리는 거의 쓰레기장을 방불케 한다(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한적하다). 담배꽁초부터 시작해서 마스크, 종이, 플라스틱, 비닐, 캔, 망가진 구두 한 짝 등등이 굴러다니는 새벽 거리를 요리조리 지나서 계산 성당으로 미사를 갈 때 평범하게 마주치는 일상이다. 열심히 청소하는 미화원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보건 안 보건 눈이 마주치던 그렇지 않든 머리를 숙여 인사하며 이들이 나를 위해 순교의 길을 걷는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사에 간다.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면 무뚝뚝한 얼굴에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이지만 눈인사, 고개 인사를 받을 때도 있다. 마음으로 쾌재를 부르며 오늘도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 본다. 그들에게만 순교를 맡길 것이 아니라 나도 하루를 기쁘게 봉헌하며 일상의 삶을 봉헌하기 위해 나는 또 외친다. “예, 주님 갑니다. 가요(...)” 이렇게 최양업 신부님의 녹색 순교의 길을 걷기 위해 오늘도 땀을 봉헌하며 별난 순교가 아닌 자연스러운 희생을 순교라 외치며 웃어본다. “예, 저도 한다고요 해요(...)” 그 옛날 순교자들의 ‘피의 순교’ 시대는 끝났다 하더라도 우리가 계속 걸어야 할 순교의 길,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을 성실하게 증거하는 ‘녹색 순교’의 길이다. 녹색 순교는 일상에서 그리스도 가르침에 반(反)하는 것을 거부하고, 손해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내던져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최근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사소한 성덕을 실천하는 ‘옆집의 성인’이 되라고 한 당부는 바로 이런 녹색 순교의 삶을 살라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상이 바로 ‘피 흘림의 순교만큼 어려운 것’임을 다시 고개를 들게 한다. 일상의 따분함을, 일상의 짜증을, 일상의 편리함을 봉헌하는 것 바로 오늘날의 녹색 순교임을 모두가 기억하며 행동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코로나 19시대의 순교를 생각하고 벗님들과 나누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