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박성미 M. 루시 수녀
우리 주님의 거룩한 죽음이 그려진 십자가 이콘에는 이해를 초월하는 사랑의 신비가 배어 있다. 내 나이 어려 한창 꿈 많던 시절에는 온 인류도 사랑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내 옆에 있는 한 사람도 진정으로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그것은 비움의 과정이며 자신을 넘어서는 죽음의 여정이다. 불완전한 ‘나’라는 존재를 넘어서 모성적 사랑으로 이웃을 품어 안아야 하는 일이기에 어떻게 보면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신화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이콘을 그리며 나를 위해 죽고 부활하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스승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게 되었다. 이콘의 맨 위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반구형과 천사들이 있고 십자가에는 명패가 달려있다. 이 명패는 십자가형을 당하는 이들의 죄목을 적었던 것으로 예수님의 머리 위에도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로 “유다인들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위의 이콘에는 라틴어로만 적혀있다. 예수님의 죄목을 그분의 적대자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십자가의 사건은 명패와 더불어 이방인 빌라도를 통해 언어와 문화가 다른 온 인류에게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느님께서 섭리하셨음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의 얼굴은 중세 이후 서방교회의 성화처럼 고통으로 일그러지게 그리지 않았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내적 평화가 스며있는 듯 느껴지며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로서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하느님으로서의 신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님의 후광 밖으로 ’예수 그리스도’란 약자(Ic xc)가 적혀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왕좌인 십자가 위에서 두 팔을 벌리고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모든 이와 모든 세대를 받아들이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가 23, 34).” 그렇다. 사실 자주 나는 내가 하는 말이 이웃에게 어떤 아픔과 영향을 주는지도 모르면서 정의감에 불타 말을 할 때가 있다. 예수님의 이 기도를 통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마음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라는 복음의 말씀을 몸소 삶으로 살아 내시며 삼위일체이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두 팔을 벌리고 계신다. 예수님의 둘레에는 사랑하시는 성모님과 사도 요한이 서 있다. 아마도 유년 시기와 공생활을 통틀어 많은 기쁨과 위안을 받았으리라 추측되는 두 인물이다. 성모님의 후광 옆에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희랍어 약자(Μρ θυ)가 적혀있으며, 그분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고대하며 기다리던 구약의 백성 중 충실한 이들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수염이 없는 젊은이가 서 있고, 그의 후광 옆에는 ‘사도 요한’이란 희랍어 약자(Ιω)가 적혀있다. 슬픈 얼굴로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심중을 헤아리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사도 요한의 모습은 앞으로 올 모든 세대를 통해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를 이들을 대표한다. 우리는 여기서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에게 선물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어린 목소리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다음으로 성화에 표현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피를 들여다보자. 물은 생명을 주는 성령의 활동으로 세례성사를 가리키고, 피는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체성사를 상징한다. 교회는 이 두 성사를 주춧돌로 세워졌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낳으신 이들을 당신의 피로 키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 두려운 잔에 다가갈 때 이 거룩한 옆구리에서 나오는 피와 물을 마시듯이 다가가야 합니다.”라고 성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처럼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인류의 원조 아담까지도 잊지 않으시고 돌아가신 후 저승으로 가셔서 불러일으키신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이 십자가가 세워진 자리가 아담의 무덤 자리였다고 한다. 열린 동굴 안에 해골과 뼈가 그려지는데 해골산이라 불리는 골고타였음을 나타낸다. 요즈음은 코로나19 팬데믹과 변이바이러스 때문에 삶이 많이 불안정하다. 맑고 화창한 날씨인데도 마음 한편에는 불안이라는 먹구름이 끼어있다. 그래서인지 온 인류에게 주어진 이 거대한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 예수님께 주어진, 어떻게 보면 하느님 아버지께 주어진 십자가의 무게는 얼마나 큰 것일까? 사랑하는 것만큼 아프다. 아마도 이천 년 전 십자가 위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눈물 흘리시며 우리에게 간청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사랑, 사랑, 서로 사랑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