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리·생명이신 스승 예수님
제가 가는 곳마다 은총과 위로를 가져가게 하소서.
(스승예수님께 바치는 기도 중에서)
제가 가는 곳마다 은총과 위로를 가져가게 하소서.
(스승예수님께 바치는 기도 중에서)
모든 것 주님을 위하여….
전성심 M. 헬레나 수녀
평범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고통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는가?"라며 따지지 말고, 오히려 "왜 나라고 이런 고통을 겪으면 안 되는가?"라고 되물어야 한다는 글이 생각났습니다. 이 글에서 고통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고 견뎌내길 바라는 위안의 언어들이 고통이라는 무게를 덜어내고 있었습니다. 2015년 12월 31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 몇몇 검사를 위해 머물던 병실에서 암 진단을 확진 받았습니다. 같은 병실의 사람들이 저와 같은 모습으로 동시에 숙연해졌던 그 날의 침묵을 가끔 생각합니다. 그날 밤. 병원 성당에 앉아 하느님의 묵직한 침묵 안에서 저는 분명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무한한 긍정 같아 보이는 이 감사의 마음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우리네 삶에서 좋게 여겨지는 것이든 나쁘게 여겨지는 것이든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선하신 뜻 안으로 옮겨가신다는 것을 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홀연히 찾아든 병고에 말문이 막힌 듯 생각에 잠긴 저와 하느님의 침묵은 이유를 찾기보다는 이 시간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리라는 믿음만을 확고하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 8)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제가 선택할 수 있던 것은 세상 곳곳에서 고통을 승화시킨 사람들처럼 현재를 희망하며 주님과 함께 오늘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맡겨진 것일진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설령 그것이 육신을 옭아매고 삶의 마지막이 된다 한들…. 시야가 가려진 날이나 힘없이 걸어가게 되던 날에나 멈춰버린 듯 평범하지 못한 자신을 마주한 날에나…. 그렇게 저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지나간 어제와도 같은 하느님의 오묘한 시간 안으로 이 끝을 알 수 없는 지난한 투병 과정을 던져두고서 다만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고통이 될 이 시간에 대해 호기로운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 될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각자가 자신에게 따를 고통에 대한 반응을 선택할 자유는 제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어찌 그리 쉽게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겠냐마는 주어진 나날을 살아가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하느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불완전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주님 안에서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선택을 계속해나갈 뿐이며 그 모든 것은 전적으로 제힘이 아닌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탁된 것이었기에 가능할 수 있던 것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오래도록 침묵하시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사람의 모든 순간에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소리 없이 일깨워주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라자로를 향한 번민으로 우신 예수님의 마음처럼 여기 저와 함께 살아가는 수녀님들의 말 없는 희생과 기도의 동행은 고통이라는 짐이 기쁨이요, 사랑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사도직과 공동의 일을 하고, 세상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요량으로 희생과 기도를 드리리라 다짐했던 수도 생활에 대한 소박한 꿈에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뒤를 쫓아가고 있지만, 무엇보다 교회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제자 수녀들의 현존 안에서 오늘이라는 선물을 기적처럼 받아 살아가는 제자의 삶은 저로 하여금 겸손한 자리에서 하느님 앞에 머물게 하고 기도하게 합니다. 다만 무언가에는 투신해야 할 젊음을 쥐고서, 병고에 묶여버린 이 시간이 막연하고 때때로 병이 낫길 바라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마음이 동동거려질 때 그때마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마음으로 들려주는 ‘고통의 사도직’이라는 명분은 저로 하여금 이 시간을 더 기쁘게 사랑으로 채우며 알베리오네 신부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사도직의 의미를 찾아가도록 노력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것이 되었든 누구에게라도 고통이란 것은 지극히 홀로 견뎌내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어느 사람도 고통의 자리에서 제외되지는 않기에 더불어 살아가는 자리에서 서로를 통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스승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 중의 한 부분이기도 하겠습니다. 아마도 지면에 실린 저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벗님들도 계실 줄 압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면식도 없었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세상 누군가를 어루만지기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벗님들께 언제나 감사드린다는 표현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을 기억하는 달. 저는 기도하시는 벗님들의 마음 안에서 성심의 사랑을 느낍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다양한 봉헌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 나가실 벗님들. 이 아름다운 채움인 성심의 사도직을 통해 오늘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나날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하느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나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고자 하오니 당신께는 영광이 되게 하시고 제게는 천국을 허락하소서." (바오로가족 협력자 기도서 p.28)